휴대폰을 만들러 가면 거주지 주소를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거주지 주소를 등록하려고 하면 전화번호를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무한루프인 셈이죠. 한국인들은 답답합니다
이런 일이 생긴다면 화를 내지 않을 한국 사람이 있을까. 사람을 놀리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 일본 진출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일본은 한국인에게 익숙한 나라다. 주말을 이용해 다녀올 만큼 가깝고, 음식과 문화도 낯설지 않다. 엔저가 이어지면서 여행 수요는 더 늘었고, K콘텐츠와 K브랜드 인기에 힘입어 일본 시장 진출을 고민하는 기업도 적지 않다.
하지만 거리가 가깝다고 법과 제도까지 가까운 것은 아니다. 여행지로 만나는 일본과 사업 현장으로 들어간 일본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특히 세무와 행정 절차는 한국식 '빨리빨리' 감각으로 접근했다가 첫 단계부터 막히기 쉽다.
일본에서 세리사(일본의 세무사) 활동을 한 김철훈 누리세무그룹 대표세무사는 최근 유튜브 채널 '더존TV'의 '택스 스터디카페'에 출연해 "한국에서 사업하는 것보다 시간이 3배 정도는 더 걸린다고 생각해야 한다"며 "일본은 느리지만 확실하고, 두 세번 크로스체크하는 문화가 강하다"고 말했다.
계좌 하나 만드는데 6개월?
한국 기업이 일본에 진출할 때 가장 먼저 체감하는 차이는 속도다.
한국에서는 법인 계좌를 만드는 데 1~2주 정도 걸리지만 일본에서는 법인 통장 개설이 보통 3개월에서 최대 6개월까지 걸린다. 외국 법인에 대해서는 자금세탁이나 범죄 악용 가능성을 이유로 심사가 더 까다롭다.
간단할 것 같은 통장정리도 시간이 꽤 걸린다. 일본은 통장정리를 하기 위해 은행에서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도, 창구에 가면 직원이 또 번호표를 준다. 바로 앞에 앉아 있어도 직원이 다시 번호를 부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김 세무사는 "통장 정리 하나 하는 데도 10~15분이 걸린다"며 "한국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 답답하지만, 일본은 모든 일을 매뉴얼대로 천천히 꼼꼼하게 처리한다"고 밝혔다.
절세와 경정청구, 일본에선 조심스러운 말
유튜브만 보더라도 세무사 등 전문가들이 절세 비법을 소개하는 영상이 많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절세를 납세자의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강하다. 하지만 일본은 분위기가 다르다.
김 세무사는 "일본 세리사에게 절세를 물으면 '왜 나한테 탈세를 물어보지?'라고 느껴 신고를 잘하면 된다는 식의 원론적인 답변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경정청구에 대한 태도도 다르다. 한국에서는 세금을 더 냈다고 판단되면 경정청구를 통해 과세관청과 논리를 다퉈보는 경우가 많다. 반면 일본에서는 환급을 받을 수 있는 사안이라도 세무서와의 관계를 고려해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경우가 있다.
김 세무사는 "일본도 꼭 해야 하는 상황이면 경정청구를 하지만, 국세청이나 세무서와 관계가 나빠지는 것이 더 큰 손해라고 보는 문화가 있다"며 "한국은 쟁점과 관련해 권투처럼 부딪혀서 따져보는 느낌이라면, 일본은 바둑처럼 한 수 한 수 조용히 두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같은 제도라도 쓰는 방식은 다르다. 한국에서는 경정청구가 납세자 권리 구제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지만, 일본에서는 세무당국과의 관계, 향후 조사 가능성, 평판까지 함께 고려하는 신중한 카드에 가깝다.
AI와 팩스가 공존하는 나라
일본의 세무·회계 전산시스템은 한국과 비교하면 아날로그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는 일찍이 자리 잡은 전자신고가 일본에서는 비교적 늦게 확산됐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금 신고서를 두 부 출력해 하나에는 원본, 다른 하나에는 사본 도장을 찍어 세무서에 우편으로 보내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세무서 직원이 신고서 원본과 사본이 일치하는지 확인해 도장을 찍어 세리사에게 보내주면, 비로소 신고가 접수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 2~3주가 걸렸다.
팩스 문화도 여전히 남아 있다. 김 세무사는 "일본에서는 이메일보다 팩스를 더 믿는 분위기가 있다"며 "이메일은 해킹될 수 있지만 팩스는 안전하다고 보는 인식이 있다"고 설명했다.
회계 프로그램도 한국과 차이가 크다. 한국은 회계, 급여, 법인세, 개인세무 등 여러 기능이 하나의 프로그램 안에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일본은 회계 모듈, 세무 모듈, 고정자산 모듈 등을 따로 구입해 사용하는 방식이 여전히 많다. 회계 데이터를 저장한 뒤 세무 프로그램에서 다시 불러오고, 수정이 필요하면 다시 회계 프로그램으로 돌아가는 식이다.
김 세무사는 이를 두고 "한국으로 치면 10~15년 전 프로그램을 쓰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일본에서도 클라우드 회계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지만, 기존 프로그램에 대한 신뢰가 강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환경에서 일본 세리사들이 생성형 AI를 업무 보조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본 세무업계 전체가 AI를 사용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젊은 세리사들을 중심으로 AI를 적극적으로 쓰는 사례가 늘고 있다.
젊은 세리사들은 영수증을 스캔한 뒤 생성형 AI로 분개장이나 CSV 파일을 만들고, 이를 회계 프로그램에 업로드한다. 전월 재무제표와 당월 재무제표를 비교해 빠진 항목을 찾거나, 일본 소비세처럼 판단이 복잡한 항목을 구분할 때도 AI의 도움을 받는다.
김 세무사는 "일본은 AI를 쓰는 사람은 잘 쓰고, 안 쓰는 사람은 거의 쓰지 않는다"며 "한국처럼 회계 프로그램 자체에 AI 기능이 통합되는 방식보다, 챗GPT나 클로드 같은 생성형 AI를 개인적으로 활용해 부족한 전산 환경을 보완하는 방식에 가깝다"고 말했다.
☞김철훈 세무사는?
일본 세무전문가로 알려진 그는 일본어에 능통할 뿐더러, 일본 세무 환경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일본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의 세무대리인으로 인기가 높다. 2010년 세무법인 하나의 국제조세 본부에서 첫 세무사 생활을 시작한 것이 그가 일본 세무전문가가 된 계기가 됐다.
당시 여러 국가의 세법과 조세조약 등을 전반적으로 고려하여 해결해 나가는 업무에 흥미를 느껴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세리사사무실에서 근무했다. 이후 일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누리세무그룹을 설립했다. 현재는 한일세무사친선협회에서 한·일 세무사의 어려움과 문제해결 방법을 서로 공유하며, 한국에서 일본으로 진출하거나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업체들과 해외교포의 비거주자 세무를 돕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