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최고재무책임자(CFO) 역할까지 할 수 있을까.
생성형 AI가 처음 주목받은 영역은 글쓰기와 검색, 요약이었다. 보고서를 정리하고, 이메일 초안을 쓰고, 법령이나 판례 등 필요한 내용을 찾아주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몇 년 사이 AI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이제는 데이터를 해석해 사람에게 의미 있는 신호를 주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매출과 비용, 재고, 매출채권, 현금흐름 데이터를 분석해 기업의 위험 신호를 포착하고, 필요한 금융 조달 가능성까지 제시하는 방식이다.
그동안 CFO나 재무 담당자가 해오던 일의 상당 부분을 AI가 보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전사적자원관리(ERP) 기업인 더존비즈온의 지용구 공동대표는 지난달 30일 열린 한국AI서비스학회 AI경영정보서비스분과 정기세미나에서 'AI와 기술경영' 발표를 통해 "기업의 경영 활동의 과정과 기록을 담은 ERP가 AI와 결합하면, 기록의 시스템에서 이해와 실행의 시스템으로 진화한다"고 강조했다.
AI는 기술이 아니라 '경영'
지 대표는 본격적으로 발표에 앞서 지난해 3월 방한한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최고경영자(CEO)와 나눴던 대화를 소개했다.
당시 지 대표는 "AI가 기술의 연구보다는 경영의 영역과 좀 더 가까워졌다. 엔지니어의 도움이 없이도 기업의 경영자가 ERP에 접근하기 좋아진 시대가 됐다"며 "AI가 경영 의사결정과 긴밀히 연결되고 있다"고 말했다.
나델라 CEO는 "AI가 경영과 가까워졌다는 관점에 공감한다"며 "AI가 가져온 변화를 단순한 선형적 개선이 아닌 완전히 비선형적인 변화로 규정한다"고 화답했다. AI가 가져온 변화를 단순히 기존 업무가 조금 더 빨라지는 수준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변화로 본 것이다.
이제 AI가 등장하면서 ERP도 단순히 기업의 경영 활동을 한곳에 모아놓는 시스템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됐다. ERP는 회계, 인사, 구매, 생산, 물류, 자금 흐름 등 기업 활동의 기록이 쌓이는 공간이다. 하지만 기록이 많다고 해서 필요한 정보를 곧바로 꺼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0년 전 자녀의 피아노 연주 사진이 외장하드 어딘가에 저장돼 있다고 해도, 날짜와 폴더를 모르면 바로 찾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ERP도 마찬가지다. CFO나 CEO가 자금 흐름을 보고 추가 금융 조달이 필요한지 판단하려면, 사람이 방대한 데이터 중 필요한 자료를 골라내고 해석·분석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AI가 ERP와 결합하면 달라진다. ERP가 단순한 장부가 아니라 경영 상태를 읽는 도구가 될 수 있다. AI가 ERP 안에 쌓인 데이터를 분석해 매출, 비용, 현금흐름, 재고, 거래처별 회수 기간 사이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매출이 늘었다고 해서 기업 상태가 반드시 좋아졌다고 볼 수는 없다. 매출채권 회수가 늦어지고 있거나, 재고가 함께 쌓이고 있다면 외형 성장 뒤에 현금흐름 악화라는 위험이 숨어 있을 수 있다. AI는 이런 숫자 사이의 관계를 읽고 경영자가 놓치기 쉬운 신호를 찾아낼 수 있다.
그렇다고 AI가 사람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고 본 것은 아니다.
지 대표는 “회계사, 변호사, 검사 등 많은 전문가들이 일상 업무 중 상당 부분을 반복적이거나 비전문적인 작업에 할애하고 있다”며 “전문가다운 일을 하기 위해 자료를 찾고 검토하고 분류하고 구조화하는 데 80%의 시간을 쓰고 나서야 본인의 일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반복·비전문적인 작업을 AI가 대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CFO가 기업의 위험 신호를 읽고, CEO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데이터를 모으고 구조화하는 일을 AI가 상당 부분 맡을 수 있다는 의미다. 사람은 AI가 정리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최종 판단과 책임 있는 의사결정에 집중하는 구조다.
회사 장부에서 금융 조달까지
이런 흐름에 따라 기업용 소프트웨어 업계에서는 ERP에 AI를 결합해 기업의 월별 손익계산서, 재무상태표, 현금흐름 관련 지표 등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경영진단 보고서를 제공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기업이 더존비즈온이다.
더존비즈온은 ERP와 금융을 결합해 기업의 업무 흐름 안에서 금융 서비스가 작동하는 'ERP 뱅킹'도 준비하고 있다.
기업이 대출을 받기 위해 별도의 인터넷뱅킹이나 은행 지점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ERP 안에서 매출채권, 재무 데이터, 현금흐름 등을 기반으로 금융 서비스를 신청하고 이용하는 방식이다.
지 대표는 "기존에는 경영자가 복잡한 ERP 시스템에 접근하기 위해 IT 부서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며 "AI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면 권한을 가진 경영자가 훨씬 쉽게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지 대표는 AI 시대의 ERP를 기업의 '운영체제(OS)'에 비유했다. ERP가 단순한 회계·인사 프로그램을 넘어 기업 내부 데이터와 업무 흐름을 연결하는 기반 시스템이 된다는 의미다.
사람이 모든 데이터를 직접 찾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AI 에이전트가 업무 맥락을 이해하고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그는 "OS가 없으면 애플리케이션이 돌아가지 않듯, 앞으로 ERP는 기업 활동의 기반이 되는 시스템으로 진화할 것"이라며 "영업, 구매, 자재, 생산, 회계, 세무 등 각 업무 프로세스를 이해하는 AI 에이전트가 사람의 일을 보조하고, ERP는 그 뒤에서 보이지 않는 운영체제처럼 작동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세미나에서는 김재영 메디워크에이아이 이사가 '빅테크가 헬스케어에 뛰어든 이유'를, 문성후 문리드랩 대표가 '빅테크 리더로부터 보는 AX 리더십'을, 정현수 더존비즈온 전무가 '우리는 어떻게 동료가 된 AI를 만들었는가'를 주제로 발표했다. 참석자들은 각 분야 사례를 통해 AI 산업의 변화와 활용 가능성을 살펴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