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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사 50년]광복해도 통관은 일본인이 계속…왜 그랬을까?

  • 2026.09.03(목) 07:00

①세관화물취급인→통관업자…국경 넘는 물건은 누가 맡아왔나

관세사의 역사는 단순한 자격사 연혁이 아니다. 외국인이 통관을 주도하던 시절부터 국가에서 인정하는 전문 자격증을 가진 직업(국가전문자격사)의 탄생, 업무의 컴퓨터화(전산화), 자유무역협정(FTA), 그리고 인공지능(AI) 시대까지, 국경을 넘는 물건을 누가 판단하고 책임질 것인가를 둘러싼 변화의 역사다. 한국관세사회 창립 50주년을 맞아 관세사의 뿌리와 역할이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짚어본다.

최근 배우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를 둘러싼 친일 논란이 불거지면서 80여년 전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다시 소환됐다.

안양시는 과거 안상호를 독립운동가로 소개했던 게시물을 비공개로 돌렸고, 그의 재산까지 친일재산 환수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놓고 논쟁이 이어졌다.

공교롭게도 정부는 올해 친일재산 환수 작업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활동했던 친일재산조사위원회를 16년 만에 다시 설치하기로 하고 지난 6월 설립준비단을 출범시켰다. 새 위원회는 오는 12월 출범할 예정이다. 

이처럼 광복 81년이 지난 지금도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어디까지 찾아내고 바로잡아야 할지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광복 직후 우리가 되찾아야 했던 것은 재산만이 아니었다. 

나라를 되찾았다고 국경을 넘는 물건을 다루는 일까지 곧바로 우리 국민의 손에 돌아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인 1947년 인천세관에서 통관업무를 담당한 사람은 중국인 8명과 일본인 10명, 총 18명이었다. 한국인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세관화물취급인 출입 배지. 이 배지를 착용해야 세관에 출입할 수 있었다. [제공: 한국관세사회]

이유는 세관화물취급인 제도다. 관세사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세관화물취급인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 등장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에서 시행하던 화물취급인 제도를 조선에도 적용했다.

영업을 하려면 면허를 받아야 했고 신원보증금을 맡겨야 했다. 종업원을 고용하거나 지점·대리점을 둘 때도 세관에 신고해야 했다. 오늘날 관세사 등록이나 사무원 관리제도를 떠올리게 하는 틀이 이미 100여년 전에 만들어진 셈이다. 

세관화물취급인이라는 이름만 보면 부두에서 짐을 싣고 내리는 사람처럼 들린다.

하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달랐다. 세관화물취급인은 화주를 대신해 수입·수출신고를 하고 보세구역에 들어간 물건을 꺼내는 절차를 처리했다.

1941년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창고 반출입신고와 해로·육로 신고는 물론 세관 근무시간이 끝난 뒤 통관을 위한 임시 개청, 지정장소 외 하역 허가, 식물검역 신청까지 맡았다.

단순히 물건을 나르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 필요한 행정절차를 대신 처리하는 사람이었던 셈이다.

영업 문턱도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높았다. 면허료를 내야 했으며, 인천·부산·경성에서는 2000원 상당의 신원보증금도 제출해야 했다. 지점이나 대리점을 만들 때도 신고가 필요했다.

이런 이유로 실제 통관 현장에서는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춘 일본인과 중국인 화물취급인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80년 전에도 고민은 '통관 수수료'

흥미로운 대목도 있다. 당시 화물취급인들은 대부분 건당 0.5~1원 수준의 취급수수료를 받았다. 업무와 지역, 업체에 따라 가격은 달랐다.

신의주세관의 당시 보고서에는 물가 상승으로 영업비용이 늘면서 화물취급인들의 경영이 어려워졌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지금 관세사 업계에서 수수료 문제가 끊임없이 거론되는 것을 생각하면, 80여년 전에도 통관 일을 하고 얼마를 받아야 먹고살 수 있느냐가 고민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는 수수료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누가 통관을 할 것인가였다.

왜 일본인이 계속 통관했을까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제도가 한꺼번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은 행정 공백을 막기 위해 기존 법령을 폐지하기 전까지 계속 적용했다. 세관화물취급인 제도도 유지됐다.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47년이다.

인천세관은 중국인 8명과 일본인 10명 등 18명이던 기존 구성을 조선인 10명과 중국인 3명 등 13명으로 재편했다. 외국인 중심이던 통관 구조를 우리 국민 중심으로 바꾸고 자주적인 통관질서를 회복하기 시작한 첫걸음이었던 셈이다.

세관화물취급인 자격증. 1911년부터 유지된 세관화물취급인 제도는 1967년 통관업자 제도로 바뀌었다. [제공: 한국관세사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법도 바뀌었다.

1949년 11월 제정된 관세법은 세관화물취급인을 화주의 위탁을 받아 통관절차와 이에 따른 보세구역 반입·반출 등을 처리하는 사람으로 규정했다.

세관화물취급인 허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제한했다. 대한민국의 통관 주권이 우리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법으로 명시한 셈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무역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세관화물취급인 제도는 더 이상 현실에 맞지 않았다.

통관업자의 탄생 

1960년대 한국은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에 들어섰다.

1964년 약 4억달러 수준이던 수입액은 1970년 19억달러로 늘었다. 1974년에는 수출 45억달러, 수입 69억달러를 합쳐 총 무역액이 114억달러에 달했다.

세관 조직도 커졌다. 1948년 8개 세관, 300여명이던 조직은 1970년 14개 세관, 1870명으로 확대됐고 같은 해 관세청도 독립해 출범했다. 

무역이 커지면서 통관의 성격도 달라졌다.

더 이상 화물을 창고에 넣고 빼는 절차만 처리해서는 안 됐다. 수출·수입 신고를 하고 물건에 맞는 세율을 적용하며 각종 세관 절차를 대신하는 일이 갈수록 중요해졌다.

결국 1967년 관세법 개정으로 세관화물취급인은 통관업자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법에서 업무를 설명하는 표현도 달라졌다. 세관화물취급인이 통관절차와 물품의 반입·반출 등을 취급하는 사람이었다면, 통관업자는 화주의 위탁을 받아 수출·수입·반송 등의 절차를 대행하는 사람으로 규정됐다.

하지만 지금의 관세사와는 달랐다.

통관업자가 되려면 자격고시에 합격하는 것만으로 부족했다. 세관장의 허가를 받아야 영업할 수 있었다.

보증금을 예치해야 했고, 수수료율도 인가받아야 했다. 세관장은 보고를 요구하거나 검사할 수 있었으며, 문제가 있으면 허가를 취소할 수 있었다.

통관업자는 국가가 전문성을 인정하는 독립된 자격사라기보다, 세관의 감독 아래 영업하는 허가사업자였다.

132개를 73개로 줄였더니…이번에는 모자랐다

무역이 더 커지자 새로운 문제가 터졌다. 이번에는 통관업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1971년 전국 통관업자는 132개. 관세청은 부실업체 38개를 정리했다. 11개 업체는 직권으로 허가를 취소했고, 27개 업체는 자진 폐업했다.

이어 세관별로 영업할 수 있는 통관업자의 숫자를 미리 정하는 TO(정원)제를 도입했다.

전국 통관업 허가권은 73개로 제한됐다. 자격을 갖췄더라도 TO가 없으면 시장에 들어가기 어려웠다.

통관업자의 난립과 과당경쟁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한정된 허가권을 누가 가져갈지를 둘러싼 경쟁이 생겼고, 제한적인 허가 운영은 특혜나 유착 시비를 낳기도 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뒤에는 반대의 문제가 생겼다.

무역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통관업자의 수요가 증가했다. 1971년 73개였던 통관업 허가권은 1975년 99개로 늘었고 이후 다시 114개까지 확대됐다. 

정부가 통관업자의 숫자를 줄였다가 다시 늘리는 사이 통관업무는 더 빠르게 복잡해지고 있었다.

품목을 어떻게 분류할 것인지, 물건의 가격을 얼마로 평가할 것인지, 관세는 얼마나 부과하고 환급할 것인지 등 전문적인 판단이 필요한 업무가 늘었다. 처음으로 통관 업무에 대한 전문성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1976년,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새로운 전문직이 등장했다.

바로 관세사다.

※ 참고자료: 한국관세사회 발간 『무역강국의 숨은 주역 관세사 50년사』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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