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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사 50년]"자격증에 갇히지 마라"…역사에 남은 사람들

  • 2026.09.08(화) 07:38

④이용준·성경란·정운기·한휘선 관세사 인터뷰

"자격증이 오히려 자신을 묶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세관화물취급인에서 통관업자를 거쳐 지금의 관세사가 탄생하기까지의 역사는 통관 주권의 회복과 대한민국 무역 성장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그만큼 관세사라는 국가전문자격의 탄생이 갖는 의미는 작지 않다. 그런데 40년 넘게 관세사로 살아온 이용준 관세사는 정반대의 말을 했다.

한국관세사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아 펴낸 『관세사 50년사』에는 이런 이야기가 곳곳에 숨어 있다.

책에는 법과 제도, 조직의 연혁뿐 아니라 관세사 역사를 생생히 증언하는 8명의 인터뷰가 담겼다. 관세사회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제도사가 온전히 기록하지 못한 관세사 직역의 또 다른 면모"를 남기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관세사 제도 연혁에는 1976년 관세사제도 도입, 1995년 관세사법 제정이라는 한 줄만 남지만, 그 한 줄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 직접 뛰었던 사람들이 있다.

'첫 여성 관세사 합격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성경란 관세사는 세관공무원으로 일하던 시절 결혼과 출산 이후 보직과 승진에서 달라진 대우를 겪은 뒤 새로운 길을 만든 인물이다.

밀수 단속을 하던 공무원에서 관세 컨설팅 시장을 개척한 사람도, 신문 오보 한 줄 때문에 관세사를 선택한 사람도 있다.

『관세사 50년사』에 실린 인터뷰 가운데 서로 다른 시대와 변화를 보여주는 이용준·성경란·정운기·한휘선 관세사 등 네 사람의 삶을 다시 들여다봤다.

관세사법 만든 이용준 관세사 "현장에서 실력을 쌓아라"

이용준 관세사. [출처: 한국관세사회 '관세사 50년사']

이용준 관세사의 관세사 인생은 제도를 만드는 데서 시작됐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그는 외무직·행정직·재경직 시험에 모두 합격한 뒤 관세청에 들어갔다.

1970년대 수원세관에서 근무할 때는 삼성전자를 담당했다. 일본에서 자동판매기 샘플이 처음 들어오고 '반도체'라는 낯선 부품이 통관되던 시절이었다. 한국 제조업이 막 성장하기 시작한 현장을 세관에서 지켜봤다.

이후 재무부 법령 담당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관세사 제도를 만드는 업무에도 참여했다. 정작 담당 공무원이어서 시험에는 응시할 수 없었고, 다른 부서로 옮긴 뒤에야 시험을 치렀다. 1981년 합격하자 곧바로 사표를 냈다.

대만 유학을 보내줄 테니 남으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수원세관에서 우리나라 제조업이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관세사라는 길이 점점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관세사가 된 뒤에는 자신이 몸담은 직업의 법을 만드는 데 나섰다.

당시 세무사와 변호사, 공인회계사는 각각 독립된 법률을 갖고 있었지만 관세사는 관세법 안에 관련 조항이 들어 있는 형태였다.

이 관세사는 1994년 김광수·강재운·성백운·홍용기 관세사와 함께 독립된 관세사법 제정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법을 공부했던 경험을 살려 세무사법과 변호사법을 참고해 초안을 짜고 국회를 오갔다.

관세사 5명이 직접 법안의 기초를 만들고 건의한 끝에 1995년 독립된 관세사법이 제정됐다.

그런데 40년 넘게 관세사로 살아온 지금, 그는 관세사 자격증을 다른 시선으로 본다.

"관세사 자격을 따면 하는 일이 관세사법상의 직무 밖에 없다. 시야가 좁아지고 능력이 한정된다"

다시 선택한다면 창업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관세사라는 직업을 법으로 독립시키는 데 힘을 보탠 사람이 이제 후배들에게는 그 법이 정한 울타리 너머까지 보라고 말하는 셈이다.

"자격증에 기대지 말고 현장에서 실력을 쌓아야 한다. 결국은 인간관계가 중요하다. 전화 한 통 친절하게 받는 것부터가 그 시작이다"

'품위유지비' 3만원…첫 여성 관세사의 월급

성경란 관세사. [출처: 한국관세사회 '관세사 50년사']

성경란 관세사는 1976년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김포공항세관에서 근무하다 1987년 첫 여성 관세사 합격자가 된 인물이다.

당시에는 공무원시험에 합격하면 어디에서 근무할지 본인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발령을 받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김포공항세관에서 근무하게 됐지만, 생각보다 적성에 잘 맞았다.

특이했던 건 품위유지비다. 당시 월급은 15만원 남짓이었는데, 별도로 3만원이 넘는 품위유지비도 지급됐다. 적지 않은 돈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이 여성에게 마냥 좋은 시절이었던 것은 아니다.

결혼과 출산 이후 보직과 승진에서 이전과 다른 대우를 경험했고, 결국 공직을 떠나는 이유 중 하나가 됐다.

"이것이 공직을 그만둔 하나의 원인이었고, 그래서 새로운 길로 갈 수 있었다. 때로는 벽이 있으니 돌아갈 길도 생기는 것 같았다"

그 돌아간 길이 관세사였다.

성 관세사는 1987년 첫 여성 관세사 합격자가 됐고 1988년에는 여성으로 처음 관세사 사무소를 열었다. 다음 여성 개업자가 나온 것은 1998년이었다. 약 10년 동안 사실상 홀로 여성 관세사의 길을 걸었다.

처음 영업을 나가면 거래처에서는 여성 관세사라는 점을 신기하게 여겼다. 

그러나 낯섦은 오히려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드는 무기가 됐다. 무역업체를 직접 찾아다니며 거래처를 만들었고, 당시 만난 작은 기업들이 성장하면서 자신의 사무실도 함께 컸다.

육아와 일을 병행할 방법이 없으면 스스로 만들었다. 합동관세사무소를 차리고 서로 교대로 일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땐 그냥 버텼을 뿐인데, 지나고 보니 그게 일과 삶의 균형이었다. 그 시절 저도 '될까?' 하면서도 그냥 했다. 두려움보다 도전이 항상 조금은 더 커야 한다"

이것이 첫 여성 관세사가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시장의 흐름을 읽다…통관 너머를 본 정운기 관세사

정운기 관세사. [출처: 한국관세사회 '관세사 50년사']

정 관세사는 1977년 관세청에서 근무를 시작한 뒤 주요 보직을 거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중에서도 해외 근무 경험은 이후 관세사로서의 길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홍콩 관세관으로 근무할 당시에는 93건의 밀수를 적발한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이후 주미대사관 관세관으로 재직하면서는 미국 관세당국과 마약·가짜상품 단속을 위한 정보교환 체계를 구축했다. 이 경험을 통해 국제 관세행정에서 위험관리의 중요성을 일찍 체감했다.

특히 미국에서 접한 관세심사 제도를 주목했다. 수입자가 스스로 적정하게 신고할 책임을 지고, 세관은 이후 이를 심사하는 구조였다.

정 관세사는 우리나라도 결국 통관은 간소화되고 사후심사가 중요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렇다면 통관이 쉬워지는 시대에 관세사는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정 관세사가 찾은 답은 심사와 컨설팅이었다.

2003년 에이원관세법인을 설립하면서 관세심사와 과세가격, 품목분류, FTA, 환급 등을 핵심 사업으로 키웠다. 당시 업계에서는 아직 생소한 분야였지만 기업들의 관세 리스크가 복잡해지면서 전문적인 조언을 찾는 수요도 커졌다.

AI 시대를 보는 시각도 다르지 않다.

반복적인 신고업무를 AI가 상당 부분 대신할 수는 있지만 국제무역 관행과 관세제도, 기업의 위험요인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전문성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후배들에게는 매년 하나의 분야라도 깊게 파라고 주문한다. 품목분류든 과세가격이든 외환이든 FTA든 자신만의 전문영역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밀수 단속 현장에서 컨설팅 시장까지 이어진 정 관세사의 행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지금 있는 일을 지키는 데 머물기보다 다음에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먼저 찾았다는 점이다.

최연소 관세사회장 "선배들이 후배한테 쫄려야 한다"

한휘선 관세사. [출처: 한국관세사회 '관세사 50년사']

2013년. 41세로 역대 최연소 관세사회장이 된 한휘선  관세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계기는 신문기사였다.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고려대 무역학과 학생 시절, 부모가 관세사의 소득이 가장 높다는 기사를 보고 이 자격증을 권했다.

그러나 시험 준비를 시작한 뒤, 해당 기사가 오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 후 스터디 멤버들과 당시 규모가 크다는 인천의 관세법인을 찾아갔다. 관세사 업계가 어떤지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보다 열악한 환경을 본 친구 네 명은 관세사를 포기했다.

한 관세사는 반대로 생각했다. '60세 넘은 분들이 관세사를 하고 계신다면, 앞으로 10년만 시장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별로인 시장이라고 판단해 돌아설 때 그는 오히려 기회가 있는 시장이라고 본 것이다.

1998년 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제대로 된 관세법 해설서가 없었다. 법령집만 있자 6개월 동안 직접 해설서를 썼다. 관세사라는 자격증 자체가 생소하자 12개 대학을 돌아다니며 학생들에게 관세사를 알렸다.

2003년 개업할 때는 거래 물량도, 연줄도 없었다. 빌딩을 직접 돌고 전화를 걸며 고객을 찾았다. 그렇게 개인사무소에서 시작해 관세법인으로 키웠고, 2013년 41세에 역대 최연소 관세사회장이 됐다.

2023년에는 한국고시관세사회를 만들었다. 젊은 관세사들의 목소리를 모아 변화의 물꼬를 트겠다는 것이었다.

관세사회장부터 고시관세사회 창립까지 관세사 업계를 위해 열심히 달려온 그는 "잘 먹고 잘 사는데 아무 것도 안 하는 선배가 되고 싶지는 않다"며 "선배들이 후배한테 쫄려야 이 업계가 산다. 그런 날이 빨리 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 기사는 한국관세사회가 발간한 『무역강국의 숨은 주역 관세사 50년사』를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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