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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엔 왜 머크·보쉬 같은 기업이 없을까

  • 2026.05.26(화) 15:10

국내외 기업승계 사례 살펴보니

15년 동안 12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국가 평균 GDP(국내총생산) 성장률보다 4배 높은 성장을 이룬 기업이 있다면 어떠십니까?

국가 경제 차원에서 수십만개의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고 장기간 유지한 기업이 있다면 국가 역시 이 기업들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정부가 수십만개의 일자리 창출을 정책 목표로 내세우는 상황에서 민간에서 이를 실현한 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일 역시 중요한 경제 과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업이 어디인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바로 독일의 '히든챔피언(Hidden Champion)' 기업들입니다. 히든챔피언이라는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 1~3위를 차지하는 독일의 강소·중견기업을 말합니다. 이 개념은 독일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이 1990년대 초에 정의했습니다.

독일에는 약 1300개의 히든챔피언 기업이 독일 제조업과 수출 경쟁력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이들 기업은 단기 수익보다 장기 생존을 중시하는 경영구조 덕분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상대적으로 높은 회복력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 배경에는 가족기업 중심의 장기주의 문화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히든챔피언은 30년 뒤에도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과도한 차입이나 금융투자, 무리한 인수합병을 지양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업종 역시 산업용 특수밸브, 의료용 핵심부품 등 아무나 접근하기 어려운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제조업 중심이라는 점도 특징입니다.

또 히든챔피언 기업들은 회사가 어려워졌다고 미국식 구조조정처럼 대량해고를 택하지 않았습니다. 숙련 기술자를 잃으면 경쟁력 자체가 무너진다는 판단 아래 고용을 유지했고, 결과적으로 위기 이후 회복 속도도 빨랐습니다. 이는 독일에 장수 제조기업이 많은 이유 중 하나로 꼽힙니다.

물론 가족기업이라고 해서 모두 장수기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은 단순한 지분 상속이 아니라 장기 전략과 기술 축적, 후계자 검증, 갈등관리 시스템이 함께 작동하느냐에 있습니다.

이것이 독일에 장수기업이 많은 비결입니다.

독일 머크·보쉬의 핵심은 '영속성'

독일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족 장수기업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머크(Merck KGaA)는 단순한 제약회사를 넘어 350년 넘게 살아남은 과학기술 기반 기업으로 꼽히죠. 현재는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와 생명과학 분야까지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1668년 약국으로 출발한 머크는 현재도 창업 가문이 지배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머크 가문의 지주회사인 E. 머크 KG(E. Merck KG)가 전체 자본의 약 70%를 보유하고 있으며, 나머지 약 30%는 1995년 대규모 자금 조달 과정에서 일반 투자자에게 공개됐습니다.

머크는 일반적인 주식회사와 달리 '주식합자회사(KGaA)' 구조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일상 경영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하면서도, E. Merck KG가 이사회 구성원 임명·해임 권한과 전략적 의사결정 권한을 갖는 방식이죠.

이를 통해 머크는 단기 실적이나 주주 압박보다 기술 축적과 장기 생존에 초점을 맞춘 경영을 이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독일의 대표 제조기업인 보쉬(Bosch)도 머크와 함께 유명한 기업이죠. 1886년 설립된 보쉬는 자동차부품 기업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는 산업자동화, 반도체, 전동공구, 에너지 시스템 등 다양한 첨단 기술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보쉬의 가장 큰 특징은 독특한 지배구조인데요. 일반 상장기업과 달리 보쉬는 비상장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회사 지분 대부분은 독일 최대 규모 공익재단 중 하나인 로베르트 보쉬 재단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다만 의결권은 '보쉬 산업신탁합자회사(Robert Bosch Industrietreuhand KG)'에 위탁해 재단이 93%의 의결권을 행사하는 구조입니다. 

이러한 지배구조를 통해 보쉬는 후손들에 의한 경영간섭 가능성을 차단하고, 재단이 배당으로 확보한 재원의 상당 부분을 기업에 재투자해 외부 투기자본으로부터 회사를 보호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즉, 기업의 영속성을 확보한 것이죠.

삼성가의 롤모델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

스웨덴의 발렌베리(Wallenberg) 가문 역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족 장수기업 사례로 꼽힙니다. 삼성가의 롤모델로 자주 언급되는 발렌베리 가문은 독일 보쉬와 마찬가지로 기업재단을 중심으로 한 독특한 지배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1856년 창업주의 은행 설립으로 시작된 발렌베리 가문은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는 철학 아래 재단과 투자회사를 통해 스웨덴 핵심 산업기업에 장기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왔습니다. 통신기업 에릭슨(Ericsson), 가전기업 일렉트로룩스(Electrolux), 제약기업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 등이 대표 사례로 꼽히죠.

이 가문이 주목받는 이유는 엄격한 후계자 육성 방식 때문입니다. 후계자 후보군은 자력으로 해외 유학과 금융권 경험 등을 거치며 10년 이상 검증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단기 배당이나 사익보다 기업의 장기 생존과 사회 환원을 중시하는 경영철학 덕분에 스웨덴에서는 국민기업에 가까운 이미지로 인식된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외 장수기업 모델이 단순한 세습경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독일과 스웨덴의 장수기업들은 전문경영인 체제와 엄격한 후계 검증, 장기 기술투자, 공익재단 구조 등을 통해 기업의 영속성을 제도화해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에서 인식되는 가족기업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기업승계, 어디까지 왔을까

해외 장수기업에 비해 우리나라의 기업승계는 아직 이렇다 할 문화나 원칙, 국민적 인식은 물론 제도적 뒷받침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기업승계 컨설팅이 세제지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상속세 부담이 크기 때문에 갈등 리스크 관리나 후계자 교육을 준비보다는 절세 컨설팅에 관심을 더 가지고, 후계자의 경영 능력 평가는 잘 이뤄지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병선 한국가족기업연구원장은 소유권과 경영권 승계, 가족 간 갈등 관리, 후계자 육성 등 종합적인 컨설팅을 하고 있습니다. 조 원장이 공개한 국내 기업승계 사례를 소개합니다.

먼저 기업승계 과정을 혁신의 과정을 통해 제2의 창업으로 연결한 의류제조유통업 A사의 사례입니다.

A사의 후계자는 기업에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창업주를 설득해 전문경영인을 영입해 7년 동안 재무구조를 개선했습니다. 또 온라인 마케팅 강화를 위해 동생이 회사 온라인 사업부를 맡도록 제안하면서 경영권 갈등 가능성도 줄였습니다.

의약품 제조업체 B사는 갈등 관리와 후계자 육성 교육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기업승계 전략을 가족·기업문화, 경영권 승계, 소유권 승계, 후계자 육성 네 가지 분야로 나눠 진행했습니다. 이를 위해 가족헌장과 행동강령을 만들고, CEO 은퇴 계획, 조세 부담, 소유권 관련 갈등과 법률 리스크 관리, 후계자 역량 강화를 위한 코칭과 멘토링 프로그램을 도입했습니다.

핵심은 후계자의 역할과 과제, 기업 차원의 과제를 분리한 점입니다. 이를 통해 기업승계의 출발점을 마련하고, 이후 발생할 갈등도 줄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모범사례로 평가됩니다. 

반면 기업승계에 대한 준비없이 갈등의 씨앗을 남긴 채 창업주가 사망한 사례도 있습니다.

업력 55년의 제조 중견업체인 C사는 창업주 사망 후 5년이 지난 현재까지 재산 상속 문제로 여러 건의 소송이 진행 중입니다. 경영권을 둘러싼 형제 간 갈등도 이어지고 있는데요. 창업주가 생전에 자녀 4명에게 회사 주식 절반을 균등하게 증여했고, 사망 이후 나머지 지분까지 균등하게 상속되면서 후계 구도가 불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후계자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균등하게 지분을 나누면 결국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가족 간 갈등이 심해지면서 일부 자녀는 회사를 떠났고, 오너 일가의 분쟁은 회사 존립을 위협하게 됐습니다.

C사의 비극은 후계 구도에 대한 철저한 사전 준비나 시스템 없이 섣불리 지분만 넘겨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처럼 기업 승계는 자칫 수십 년에 걸쳐 일군 기업의 존립 자체를 뒤흔들 수 있는 치명적이고 복잡한 과정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기업의 영속성을 위한 사전 승계 전략이나 지배구조 준비 같은 본질적인 논의는 부족합니다. 여전히 세제 지원 확대 또는 축소 등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기업승계를 단순한 '부의 대물림' 프레임으로만 바라보면, 장수 기업이 만들어내는 장기 기술 축적과 양질의 일자리라는 핵심 가치를 놓치게 됩니다. 이제는 기업승계 논의를 소모적인 세금 논쟁에서 벗어나, 국가 경제의 지속가능성과 산업 경쟁력 확보라는 차원에서 다시 써 내려가야 할 때입니다.

※ 해당 기사는 조병선 한국가족기업연구원장의 저서『가족기업의 성공승계 전략』과 논문『가족기업의 성공적인 승계 전략에 관한 연구』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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