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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와 중세, 전쟁이 세금을 만들고 세금이 의회를 만들다

  • 2026.09.10(목) 07:00

[프리미엄 리포트]이동건 국립한밭대 회계세무학과 교수

재미있는 회계·세금의 이야기 ⑥

앞서 살펴본 고대 그리스 시대의 세금은 주로 부자에게 그 부담을 지우고 담세력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반면 헬레니즘 시대의 세금은 왕국의 유지를 위해 조세행정과 기록체계를 강화하였다. 그렇다면 그 이후 고대 로마제국과 중세 봉건사회의 세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고대 로마는 작은 도시국가에서 출발하여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하였다.

제국을 만드는 데는 군대가 필요하고 군대를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따라서 로마의 역사에서 전쟁과 세금은 떼어놓기 어렵다.

그런데 로마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전쟁을 하기 위해 세금을 걷었는데, 전쟁에서 계속 승리하자 오히려 로마 시민의 세금 부담이 줄어든 것이다.

정복전쟁이 로마 시민의 세금을 줄이다

로마 시민에게는 트리부툼(tributum)이라는 재산을 기준으로 한 부담이 있었다. 특히 전쟁비용을 마련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과 정복지 및 속주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수입으로 국고가 풍부해지면서 기원전 2세기 중엽 이후에는 로마 시민에 대한 tributum 징수가 장기간 중단되었다.

세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세금을 부담하는 사람이 바뀐 것이다. 로마의 관점에서 보면 정복전쟁은 영토뿐 아니라 새로운 세원까지 가져왔다. 전쟁을 하기 위해 세금이 필요했지만 전쟁에서 승리하면 정복지에서 세금을 징수할 수 있었다. 고대 제국의 팽창과 세금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세금징수를 민간업자에게 맡기다

로마의 세금제도 가운데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특히 흥미로운 것이 푸블리카니(publicani)이다. 즉, 로마는 일부 조세와 국가수입의 징수를 국가공무원이 모두 직접 담당하지 않고 민간의 조세청부업자에게 맡겼다.

문제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세금을 많이 걷을수록 징수업자의 이익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속주에서는 조세징수 과정의 과도한 부담과 부패가 정치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오늘날 국세청의 세금징수 업무 일부를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민간사업자에게 맡긴 것과 비슷하다. 2천 년 전 로마의 세금제도는 우리에게도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세금을 걷는 사람에게 경제적 이해관계가 있다면 납세자의 권리는 누가 보호할 것인가?"

로마에는 5%의 상속세와 노예해방세가 있었다

상속세를 근대국가가 만들어 낸 세금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상속·유증에 대한 5%의 세금이 부과되었다. 가까운 친족이나 일정한 소액의 상속 등에는 예외가 있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세금의 사용처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장기간 복무하고 퇴역하는 군인들의 급여를 안정적으로 지급하기 위해 군사금고(aerarium militare)를 설치하였다. 상속세는 이 군사금고의 주요 재원이 되었다.

오늘날 식으로 단순화하면, 상속세→군사금고→퇴역군인의 퇴직급여라는 구조이다.

로마에는 더욱 특이한 세금도 있었다. 주인이 노예를 해방하여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면 노예 가치의 5%를 부담하는 노예해방세가 존재하였다. 2천 년 전의 로마는 전쟁뿐 아니라 상속과 노예해방에서도 세원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에서는 오줌에도 세금을 매겼다

로마의 세금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것은 이른바 '오줌세'이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소변과 관련된 세금을 부과하였다. 당시 소변은 단순한 폐기물이 아니었다. 세탁과 직물가공 등에 사용할 수 있는 경제적 가치가 있는 물질이었다.

아들 티투스가 아버지에게 "어떻게 오줌에까지 세금을 매길 수 있습니까?"라는 취지로 불평하자 황제는 그 세금으로 들어온 돈을 아들의 코에 갖다 대고 냄새가 나느냐고 물었다. 

티투스가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하자 황제가 말했다. "그래도 이것은 오줌에서 나온 돈이다." 여기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명한 말이 생겼다. "Pecunia non olet(돈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국가의 입장에서 경제적 가치가 발생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세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2천 년 전 로마 황제도 이미 알고 있었던 셈이다. 

독신자에게 불이익을 준 로마

로마는 사람들의 결혼과 출산에도 국가가 개입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혼인과 출산을 장려하기 위한 일련의 법률을 만들었다. 흔히 이를 로마의 ‘독신세’라고 소개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독신자에게 별도의 세금을 부과한 것은 아니었다. 

대신 결혼하지 않거나 결혼해도 자녀가 없으면 상속과 유증 등에서 불이익을 주고, 자녀가 있는 사람에게는 여러 혜택을 주었다. 즉, 세금을 더 걷기보다 재산상 불이익을 이용하여 결혼과 출산을 유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반전이 있다. 서기 9년 제정된 혼인법은 두 집정관의 이름을 따서 Lex Papia Poppaea라고 불렸는데,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정작 이 두 사람은 둘 다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다고 한다.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법을 만든 두 집정관이 모두 독신에 무자녀였던 것이다.

2000년 전 로마에서도 저출산과 혼인 문제를 법과 경제적 유인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농민 경제적 부담 커진 중세 봉건사회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서유럽에서는 로마와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조세행정이 약화되었다. 중세 봉건사회에서 농민에게 경제적 부담을 요구하는 주체는 하나가 아니었다.

왕은 세금과 군역을 요구하고, 영주는 지대와 부역을 요구하고, 교회는 십일조를 요구하였다. 특히 농민이 영주의 직영지에서 일정 기간 노동을 제공하는 부역은 장원사회의 대표적인 부담이었다.

오늘날 식으로 표현하면, "이번 달 세금 30만원을 납부하시오"가 아니라, "이번 주 사흘 동안 영주의 밭에서 일하시오"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이러한 부역과 지대를 오늘날 의미의 '세금'과 동일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국가가 부과하는 조세라기보다는 봉건적·장원적 토지관계에서 발생한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교회에는 생산물의 일정 부분을 제공하는 십일조(tithe)가 있었다. 따라서 중세 농민의 부담은 오늘날보다 복잡했다. 국가·영주·교회라는 서로 다른 권력이 동시에 경제적 부담을 요구할 수 있었다.

전쟁에 나가기 싫으면 돈으로 내라

봉건제에서는 토지를 보유한 기사와 영주에게 왕을 위한 군사적 봉사의무가 있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직접 군사봉사를 하는 대신 돈을 내는 방식이 발전하였다. 이것이 scutage, 우리말로 흔히 '방패돈'이라고 번역되는 부담이다.

왕의 입장에서도 현금은 유용했다. 봉건기사를 직접 동원하는 대신 받은 돈으로 필요한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군역→금전납부' 라는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왕이 전쟁을 계속하면서 scutage를 반복적으로 요구하면 당연히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다.

세금 때문에 왕의 권력을 제한하다

영국의 존 왕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많은 돈을 필요로 하였고 scutage를 비롯한 각종 재정적 부담을 요구하였다. 귀족들의 불만은 결국 폭발하였다.

1215년 존 왕은 귀족들의 압력으로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를 인정하였다. 조세의 역사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이 제12조이다. 즉, 일정한 예외를 제외하면 왕이 세금을 ‘귀족 및 성직자 등과 협의’ 없이 부과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오늘날의 조세법률주의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왕의 자의적인 과세권을 제한하려는 중요한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이전에는 "왕에게 얼마를 내야 하는가?"가 문제였다면 이제는 "왕에게 이 부담을 마음대로 부과할 권리가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세금의 액수에서 과세권의 정당성으로 문제가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1215년 마그나 카르타. 제12조는 일정한 예외를 제외하고 scutage와 aid를 귀족 등의 일반적 동의 없이 부과하지 않도록 규정하였다. [사진: 영국 국립 공문서관]
영국의 존왕이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하는 모습. [사진: 영국 국립 공문서관]

인두세가 농민반란에 불을 붙이다

14세기 영국은 프랑스와 백년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전쟁에는 언제나 돈이 필요하다. 영국에서는 1377년부터 여러 차례 인두세(poll tax)가 부과되었다. 특히 1380년에 승인된 인두세의 징수를 둘러싸고 커다란 불만이 생겼다.

1381년 정부가 세금을 다시 적극적으로 징수하자 불만이 폭발하였다. 그해 여름 일어난 농민반란이다. 물론 농민반란의 원인을 세금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흑사병 이후의 노동력 부족과 임금 규제, 농노제에 대한 불만 등 여러 사회·경제적 문제가 쌓여 있었다.

그러나 영국 국립 공문서관(UK National Archives)의 자료도 1381년 초여름 인두세의 징수가 농민반란을 촉발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세금은 국가재정의 문제인 동시에 언제든 정치적 문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14세기 영국의 인두세 관련 과세자료. 중세 영국의 조세자료에는 지역과 납세자, 과세액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조세행정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영국 국립 공문서관]

전쟁이 세금을 만들고, 세금이 의회를 만들다

로마에서 중세까지의 세금 역사를 길게 놓고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로마는 전쟁을 위해 세금을 걷었다. 정복에 성공하자 정복지에서 새로운 세원이 생겼다.

중세의 왕들도 전쟁을 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봉건적 군사봉사가 점차 금전납부로 바뀌고 왕에게 더 많은 현금이 필요해지면서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왕이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부담을 요구하자 귀족과 성직자 등 부담을 지는 세력은 과세에 대한 협의와 동의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곧바로 오늘날의 의회를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국의 역사를 놓고 보면 전쟁 재정과 과세에 대한 동의의 요구가 의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이 시대의 세금 역사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표현해 볼 수 있다.

"전쟁이 세금을 만들고, 세금이 의회를 만들었다."

☞이동건 교수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삼일회계법인에서 30년 동안 근무하며 Tax본부 파트너를 지냈다. 한국공인회계사 시험 세법 출제위원, 기획재정부 세제발전심의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2021년 국립한밭대학교 교수로 임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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