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 2025 Korea는 자유무역의 종언을 알린 신호탄입니다. 트럼프 2.0 시대, 무역은 다시 정치가 되었습니다"
APEC 경주에서 울린 경고음
10월 말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는 겉으론 화합을 이야기했지만, 속으로는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연결·혁신·번영(Connect·Innovate·Prosper)’이라는 밝은 슬로건 뒤에는, 80여 년간 번영을 누려온 자유무역이 더 이상 ‘당연한 가치’가 아니라는 현실이 드러났다.
캐나다 총리 마크 카니는 기자단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규범 기반의 자유무역과 투자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그는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이고 10년 내 비(非)미국 시장 수출을 두 배로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그 한마디는 APEC 회의장에 ‘자유무역의 종언’을 알리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졌다.
한국의 이재명 대통령도 비슷한 톤이었다. APEC이 전 세계 교역과 GDP의 절반을 차지하지만, 최근 교역 모멘텀이 급격히 약화되고 불확실성이 커졌다며 ‘이제는 글로벌 교역질서의 분기점’에 이르렀다고 강조했다.
그 직전, 부산에서는 트럼프–시진핑 회담이 열려 중국산 수입품 평균 관세를 57%에서 47%로 낮추는 ‘부분 휴전’이 합의됐다. 희토류 공급 재개, 미국산 대두 대량 구매 등 ‘빅딜’의 윤곽도 잡히며 시장은 잠시 안도했다.
그러나 경주 회담에서 드러난 세계 정상들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관세는 완화되었지만, 보호무역의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APEC 정상회의가 관세·FTA·무역에 미칠 파장
(1) 전면 관세전쟁은 일시 정지, 그러나 구조적 보호무역은 지속
미·중 간 관세 전쟁 완화는 물가와 공급망에 숨통을 틔워주지만, 트럼프의 ‘상호관세(Reciprocal Tariff)’—“미국에 세금 매긴 만큼 우리도 매긴다”는 보복형 무역논리—와, 철강·알루미늄 등 안보를 명분으로 한 무역법 232조, 중국산 불공정무역 제재에 근거한 301조 조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즉, 명목상 관세는 낮아졌지만 ‘미국 우선주의’라는 보호무역의 틀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2) 다자 체제에서 양자 딜·블록 중심으로 이동
캐나다의 시장 다변화 선언과 한국의 ‘분기점’ 발언은 모두, 더 이상 다자무역체제만으로는 글로벌 리스크를 관리하기 어렵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이제 세계 무역의 중심축은 WTO 협정과 같은 보편적 규범에서 벗어나, 국가 간 개별 협상(Deal)과 ‘우호국 동맹(Friend-shoring)’을 기반으로 한 지역 블록화 체제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3) 희토류·농식품·첨단부품의 ‘정치화’ 심화
이번 트럼프–시진핑 합의에 포함된 핵심 품목을 보면, 희토류·대두·반도체가 눈에 띈다.
이 세 가지는 단순한 교역 품목이 아니라, 국가 간 협상에서 전략적 지렛대로 활용되는 ‘정치적 자원’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는 글로벌 공급망의 흐름이 더 이상 시장 논리나 가격 경쟁력만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외교·안보·정책적 이해가 얽힌 정치경제적 구조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4) APEC 공동선언의 시그널: 실행 중심의 협력
이번 공동선언의 핵심은 ‘규범’보다 ‘실행(Implementation)’에 방점이 찍혔다는 점이다. 회원국들은 공급망 조기경보 체계 구축, 디지털무역 규범 정립, 산업 표준 협력, 친환경 전환 등 실질적·운영 중심의 국제협력 과제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러한 변화는 통관 절차의 디지털화, 데이터 연계, 무역 표준화와 같은 무역 인프라 전반에 직접적인 파급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기업 입장에서의 대응 포인트
① 관세·비관세 복합 리스크 매트릭스 재점검
이제는 단순히 관세율 변화만을 바라보는 시대가 아니다. 기업은 관세(무역법 232·301조·상호관세 가능성) 뿐 아니라, 수출통제, 보조금 정책(IRA·CHIPS Act), 원산지 규정 등을 포괄적으로 고려한 ‘총비용(Total Cost)’ 관점의 리스크 분석 체계를 다시 구축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배터리 산업은 리튬·니켈 등 핵심 광물의 채굴국과 제련국의 국적을, 반도체 기업은 AI칩의 설계지와 조립공정의 분리 위치를, 농식품 기업은 제품의 원산지 표시 및 가공 단계별 추적체계를 재점검해야 한다.
즉, 관세보다 공급망의 ‘국적 구조’를 관리하는 능력이 경쟁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② 미국시장 대응: ‘현지화 + 양자 딜’ 준비
일시적인 관세 인하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행정부의 정치 일정이나 정책 기조에 따라 관세가 재격화될 가능성은 상존한다.
따라서 기업은 ‘Made in USA’ 표시 요건을 충족하는 현지 생산 및 조립 거점 확보 전략을 병행해야 한다. 동시에 캐나다·멕시코·베트남 등 우호국(FTA 연계국)을 경유한 공급망 다변화 시나리오를 마련함으로써, 관세 리스크뿐 아니라 정치 이벤트 리스크까지 흡수할 수 있는 구조적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
③ 계약 구조의 ‘자동조정(Trigger Clause)’ 삽입
거래 품목의 관세율이나 수출입 규제가 정치적 요인으로 급격히 변동할 경우, 자동으로 납품가·납기·위약금(패널티) 조항을 재협의 또는 조정할 수 있는 ‘자동조정(Trigger) 조항’* 을 계약서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이는 'APEC 이후 관세 스냅백(되돌리기)'** 가능성이 상존하는 환경에서, 불확실한 통상 리스크를 계약 구조 자체로 흡수하기 위한 사전적 리스크 헤지 장치로 기능한다.
*자동조정(Trigger) 조항: 명확한 문언(예: “tariff increase” 혹은 “new trade barrier”가 Trigger로 작동한다는 정의), 수치 기준 또는 조건(예: 관세율이 10% 이상 올라갈 경우), 통지 절차 및 재협상 절차 등을 계약서에 사전에 포함하는 것이 중요하다.
**APEC 이후 관세 스냅백(되돌리기): 예시로 보면 트럼프–시진핑 회담 직후(2025년 부산 APEC 회동) 중국산 평균 관세를 57% → 47%로 인하하기로 발표했지만, 백악관 브리핑에서는 “이 조치는 중국의 수입확대 및 희토류 공급 약속 이행을 전제로 하며, 불이행 시 관세는 즉시 복원될 수 있다.”라는 단서가 붙었다. 바로 이것이 “관세 스냅백” 구조이다.
④ 통관 데이터 거버넌스 강화
기업은 HS 코드, 원산지 증빙, 부속 서류 등 모든 통관 관련 자료를 전면 디지털화해야 한다. 특히 미국의 통관 환경에서는 수입신고 단계부터 높은 수준의 정확성과 투명성이 요구되므로, 기업은 반드시 관세사 등 전문인력과 협의하여 신고자료를 사전에 검증·준비할 필요가 있다.
또한 철강·알루미늄 등 파생제품에 적용되는 함량 기준 과세 체계에 대응하기 위해, 제품별 산출 내역 및 근거 자료, FTA 적용을 위한 원산지 검증 서류, 일반 물품의 원산지 및 세율 산정 근거를 모두 감사 추적(audit trail) 형태로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이러한 데이터 관리체계는 향후 APEC이 추진하는 디지털 통관 및 데이터 상호운용성 표준화 정책과도 정합성이 높으며,
국제 협력과 사후 검증 단계에서 신뢰성과 투명성을 보장하는 핵심 데이터 거버넌스 인프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자유무역 이후의 시대, 관세는 다시 정치가 되었다
경주 APEC은 세계가 이미 ‘자유무역의 황금기’에서 ‘보호무역의 시대’로 이동했음을 확인시켰다. 관세는 더 이상 단순한 세금이 아니라 정치적 협상 수단이자 산업 재편의 도구로 작동한다.
이제 기업은 무역 환경의 급변을 읽고 대응 전략을 설계할 수 있는 관세 전문가와 협력해,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실질적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트럼프 2.0의 시대, 관세는 숫자가 아니라 국가의 의도를 해석해야 하는 언어다.
앞으로 무역의 중심에는 ‘얼마나 싸게 파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손잡고 어디서 생산하느냐’가 자리하게 될 것이다.
☞신민호 관세사는?
국내 유력 관세펌의 하나인 대문관세법인의 대표로, 25년 이상 관세와 외환 및 무역통상 분야에서 컨설팅과 통관을 아우르는 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 서울관세사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기업의 통상 리스크 대응, FTA 활용 전략, 외환거래 및 원산지 검증 분야에서 국내 유수 기업의 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2025년 7월, 책으로 펴낸 『트럼프 2.0의 경고: 관세 전쟁 속 Made in Korea 생존 전략』에서 트럼프 취임 이후 본격화하고 있는 상호관세(Mirror Tariffs) 체제를 중심으로, 한국 수출기업이 직면할 통관·관세·FTA 리스크에 대한 분석과 대응 전략을 소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