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 전쟁터에서 맺은 인연, 경제공동체라고요?
6·25 전쟁 당시, A씨는 피난길에서 한 사람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이후 강원도 주문진의 집에서 함께 지내며 피난살이를 했으며, 이들의 동행은 부산까지 이어졌다. 세월이 흘러 1977년쯤 A씨는 자수성가형 기업인으로 성장했고, 인연을 맺은 사람에게 자사 보유 주식을 양도했다. 단순한 거래가 아니라, 전쟁의 고비를 함께 넘긴 사람에게 보답하려는 마음이었다.
문제는 국세청의 시각이었다. 세법은 특수관계자에게 자산을 시가보다 낮은 가격에 양도하면, 그 차액을 증여로 본다. 당시 상속세법 시행규칙에선 특수관계인으로 보는 '친지'의 개념이 매우 넓게 잡혀 있어, 동창이나 직장동료까지도 특수관계인으로 의제됐다고 한다. 국세청은 전쟁 중 맺은 인연도 친지 관계로 보고, 주식 시가와의 차액만큼 증여세를 매겼다.
당시 국세심판소(현 조세심판원)는 이를 단순한 친지 간 증여로만 볼 수 있는지 여부와 맞닥뜨려야 했다. 결과는 취소(납세자 승소) 결정. 심판소는 심판례를 통해 "이익공동체 관계로 볼 정도로 친분이 객관적으로 명백하지 않으면 친지 관계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단순히 인간적 친분을 근거로 특수관계자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결정은 세법해석에서 친지라는 모호한 개념을 좁히는 계기가 됐다. 이후 1996년 말 세법 개정으로 특수관계인의 범위에 친지라는 규정이 사라지면서, 유사한 과세 논란은 종지부를 찍게 됐다.
◇ 현재는?
2004년부터 열거방식의 개별증여규정을 예시규정으로 대체하는 이른바 '증여세 완전포괄주의' 개념이 도입됐다. 편법적인 재산 이전으로 과세를 회피하는 행위가 복잡해지자, 이를 개별증여규정만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1980년대 : 여성이 어떻게 그만한 돈을 벌어?
1980년대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했지만, 사회 전반에는 여전히 '여성은 가사와 양육을 맡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큰돈을 모은 여성은 뒤에 누군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기 일쑤였고, 국세청의 과세 행정 역시 성차별적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988년, 전남 순천에서 활동하던 40대 여성 사업가는 국세청으로부터 자금출처조사를 받았다. 3억원대의 건물을 신축했는데, 이를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는지 의심받은 것이다. "여성이 어떻게 그만한 돈을 벌었겠냐"는 사회적 편견이 세무조사에 반영된 사례였다.
문제는 제도에도 있었다. 당시 국세청 '재산제세 조사 사무처리규정'은 40세 이상 남성은 자금의 60%만 입증해도 나머지를 인정하는 특례를 뒀지만, 여성에겐 적용되지 않았다. 여성은 자금 출처의 일부라도 증명하지 못하면 즉시 증여세가 매겨지는 불이익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실제 이 여성 사업가는 83%를 증명했음에도, 나머지 17%를 이유로 증여세 2900만원을 부과받았다.
하지만 심판소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성보다 불리하게 취급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며, 시대 흐름에 맞지 않다"며 증여세 과세처분 취소 결정을 내렸다. 여성도 남성과 같은 자금출처 기준을 적용받아야 한단 것이다. 이 결정은 세법해석의 영역에서 성평등 원칙을 제도화한 첫 사례로 남게 됐다.
◇ 현재는?
국세청은 1991년 자금출처조사에 있어 남녀간의 차별이 없도록 재산제세 조사 사무처리규정을 개정했다. 여자도 소득이 있을 경우 40세 이상은 취득 자금의 60%, 30세 이상은 70%만 출처를 입증하면 세무조사를 면제받도록 했다.

1990년대 : 국세 걷으려 '국민 주거권' 뒷전
1996년, 경기도 파주의 한 주택에 세 들어 살던 B씨는 전세금 1500만원을 걸고 이사를 왔다. 당시 B씨는 전입신고를 마치고 확정일자까지 받아 임대차보호법상 요건을 갖춘 소액임차인이었다. 그러나 집주인이 세금을 내지 못해 부동산이 압류되고 공매로 넘어가자, B씨의 보증금은 위험에 처했다.
국세청은 세금을 거둬야 한다는 이유로 단호했다. "압류는 곧 경매개시등기와 같다. 압류 이후 계약한 임차인은 보호 대상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공매 대금 배분에서 체납 국세와 근저당권 채권을 먼저 챙기고 B씨의 보증금은 뒷순위로 미뤄버린 것이다.
하지만 심판소의 판단은 달랐다. 압류는 어디까지나 국세 채권을 담보하려는 조치일 뿐, 민사상 경매개시와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단 것이다. 특히 심판소가 임차인 손을 들어준 핵심 배경은, 소액임차인 보호제도였다. 이 법에 따라 서울·광역시에선 임차보증금 3000만원 이하는 1200만원을, 기타 지역에선 보증금 2000만원 이하 땐 800만원을 각각 보호받는다.
이 제도가 단순 선언이 아니라 실제 효력을 발휘한 대표 사례로 볼 수 있다. 당시 이상룡 심판소장은 "저소득·서민계층의 주거생활 안정이 국세 징수보다 우선돼야 한다는 법정신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 현재는?
심판소의 결정으로 재경원(현 기획재정부)·국세청의 예규가 변경됐다. 2000년 10월 19일부터 배분되는 최초의 공매 대금부터는 소액 임차보증금을 국세보다 우선 배분해야 한다는 세법해석을 내놨다.
2000년대: 산후조리원 비용, 과세냐 면세냐
1990년대 후반은 산부인과 병원 내 '산후조리원'이란 새로운 서비스가 등장했다. 문제는 산후조리원 서비스가 부가가치세 면세 대상인 '의료보건 용역'이냐는 여부였다.
당시 세법은 의료보건 용역엔 부가세를 면제한다고 규정했지만, 산후조리 서비스가 여기에 포함되는지는 불명확했다. 국세청과 재정경제부도 이를 단순 생활 서비스로 보고 과세 대상으로 해석했다.
산후조리 서비스를 제공하던 한 병원은 부가세 과세처분을 받자, 국세심판원(2000년부터 명칭 변경)에 심판청구를 제기했다. 청구인(병원)은 "산후조리 용역은 산모의 질병 예방과 회복을 위한 필수 의료보건 용역으로 면세 대상"이라고 주장했으며, 국세청은 법령에 면세 대상으로 명시되지 않았다고 맞섰다.
심판원이 "의료인이 의료기관 내에서 제공하는 용역은 의학적 근거가 있는 의료보건 용역에 해당한다"며 과세처분 취소 결정을 내리면서, 세금 논란은 일단락된 듯 보였다. 하지만 국세청은 기존 해석을 고수하며 현장 혼란이 계속됐다. 결국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가 나섰다. 산후조리원 비용 과세는 저출산 시대에 산모·가정의 부담을 가중한다는 점에서 부당하다며 국세청에 예규 변경(산후조리 용역 부가세 면제)을 권고했다.
◇ 현재는?
2012년 부가가치세법 시행령이 개정되며, 산후조리원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명확히 부가세 면세 대상으로 규정됐다.
2010년대: 특수학교 부재가 만든 과세 행정의 모순
2016년 봄, 한 부부는 지적장애 1급·뇌병변을 앓고 있는 여덟 살 아이를 위해 장애인용 승합차를 샀다. 세법에 따라 자동차 취득세는 감면받았다. 자동차는 치료와 학교 통학을 위해 꼭 필요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해 가을 찾아왔다. 자녀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는데, 인근 학교 특수학급은 정원이 모두 찼던 것이었다. 지역 내엔 특수학교도 없었다. 부부는 국회의원 사무실까지 찾아가 호소했지만, 돌아온 답은 "광명 지역은 주민 반대로 특수학교 설립이 어렵다"는 냉정한 발언이었다.
부모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자녀를 다른 지역 특수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배정 조건을 맞추려면 주소지를 옮겨야만 했다. 당장 이사할 형편이 되지 않아, 아이의 주소만 친척 집에 주소를 옮겨 3개월간 세대를 분리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지자체는 곧바로 장애인용 승합차 취득세 감면을 취소하고, 수백만원의 세금을 추징했다.
사망이나 혼인 등의 부득이한 사유가 있다면 세대 분가를 하더라도 취득세 면제가 가능하다. 하지만 지자체는 자녀 학교 문제로 세대를 분가한 것은 부득이한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감면받은 취득세를 추징했다.
그러나 조세심판원(2008년부터 명칭 변경, 지방세 심판청구 사건도 관장)은 "의무교육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세대를 분가한 것은 부득이한 사유에 해당한다"며 부모의 손을 들어줬다. 교육받을 권리와 세법의 형식 논리가 맞부딪친 사건으로, 이 결정은 '교육권 보장'에 무게를 실은 판결이었다고 볼 수 있다.
◇ 현재는?
장애인용 자동차 1대는 취득세 면제가 가능하다. 다만 자동차를 구입한 지 1년 이내에 소유권을 이전하거나 세대를 분가하는 경우 면제받은 취득세는 추징된다. 단, 사망·혼인·해외이민·운전면허취소 등 부득이한 사유가 있으면 예외다.
2020년대: 세법은 태아가 상속인 아니라고요?
2018년 8월 사망한 C씨에겐 부인 D씨와 돌이 갓 지난 아이가 있었다. 당시 D씨는 둘째 아이 임신 중이었는데, C씨가 사망한 지 3개월 후 둘째 아이를 출산했다. D씨는 두 명의 아이 모두 미성년 자녀 공제 대상으로 판단해 상속세를 신고했다. 그런데 국세청은 "태아는 공제 대상이 아니다"라며 상속세를 추가로 부과했다.
민법상 태아는 상속인으로 인정돼 상속세 납세의무를 지게 되는데, 당시 상속세법엔 태아가 인적공제 대상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태아 배제'라는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태아는 세금을 내면서도, 공제는 받을 수 없는 모순이 생겼다.
심판원은 1996년 "명확한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태아에 대해 상속공제를 적용하지 않는다고 결정한 바 있다. 국세청도 26년간 이런 관행을 고수했다. 이렇다 보니 '상속개시일 당일 출생했는가' 같은 우연성으로 공제 여부를 결정하는 건 부당하다는 목소리도 컸다. 조세심판관들은 기존 관행을 벗어나 심층적으로 재검토했고, 2022년 1월 조세심판관 합동회의에서 "태아에게도 상속세 인적공제를 적용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런 결정을 이끈 공무원(조세심판원 이용형 과장·손대균 사무관)에게 '적극행정 최우수공무원' 표창이 수여됐다. 심판원 관계자는 "법은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가치를 실현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 현재는?
정부는 조세심판원 결정을 반영, 2022년 상속세 및 증여세법을 개정했다. 이 조치에 따라 2023년 1월 1일 이후 개시되는 상속분부터 상속세 인적공제 대상에 태아도 포함됐다. 자녀 공제는 피상속인 자녀에 대해 1인당 5000만원이다. 미성년자 공제는 상속인 및 동거가족 중 미성년자가 있는 경우 19세가 될 때까지 1년에 1000만원씩 공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