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관세전쟁을 시작하자 국내 수출기업들은 혼란에 빠졌다. 우리 제품에 관세가 몇 퍼센트 붙는지, 어떤 품목으로 분류되는지에 따라 미국 시장에서의 가격 경쟁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종욱 관세청장이 관세율보다 더 우려한 것은 따로 있다.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만든 제품이 한국을 거쳐 '한국산'으로 둔갑하는 우회수출이다.
다른 나라 제품에 한국산 표시를 붙여 미국으로 보내면 당장은 한국에 적용되는 상대적으로 낮은 관세를 받을 수 있다. 문제는 편법을 쓴 업체 한 곳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미국 세관은 한국에서 출발한 제품 전체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정상적으로 수출하는 국내 기업도 추가 검사를 받고 더 많은 서류를 내야 할 수 있다. 통관이 늦어지고 비용이 늘어나면 한국산 제품 전체에 사실상의 무역장벽이 생긴다.
이 청장은 유튜브 채널 '더존TV'의 '택스 스터디카페'에 출연해 "미국 관세당국이 한국에서 수출된 물품에 다른 나라 제품도 섞여 있을 것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우리 수출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새로운 무역장벽이 생긴다"고 말했다.
한국산에 한 번 붙은 의심이 얼마나 큰 비용으로 돌아올지는 계산하기 어렵다. 관세청이 우회수출을 단순한 원산지 위반이 아니라 한국 수출품의 신뢰가 걸린 문제로 보는 이유다.
관세보다 더 중요한 '한국산' 신뢰
관세청은 미국의 관세정책이 발표된 초기부터 대응팀을 가동했다. 미국 관세당국인 세관국경보호국(CBP)에서 정보를 확보해 어떤 물품에 얼마의 관세가 붙는지, 기업이 생산한 제품이 어느 품목으로 분류되는지를 국내 기업에 안내했다.
품목분류는 기업에 중요한 문제다. 비슷한 제품이라도 어떤 품목으로 분류되느냐에 따라 적용되는 관세율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세율을 정확히 알려주는 것만으로 한국 기업을 보호할 수는 없다.
국가별 관세율 차이를 노리고 한국을 관세 회피의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려는 시도도 함께 막아야 한다. 중국이나 베트남 제품을 국내로 들여온 뒤 포장과 표시만 바꾸거나, 충분한 생산공정을 거치지 않고 한국산으로 수출하는 행위가 대표적이다.
관세청은 본청과 일선 세관에 우회수출을 수사하는 전담 조직을 만들었다. 올해 상반기 적발 실적도 역대 최대 수준을 기록했다.
이 청장은 이를 단기간 집중단속으로 끝낼 문제가 아니라고 봤다. 이 청장은 "앞으로 몇 년 동안 우회수출을 철저히 단속해야 우리나라를 관세정책 회피를 위한 경유지로 이용하는 행위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짝퉁 단속에서 K-브랜드 사수로
관세청이 지켜야 할 한국산은 원산지뿐만이 아니다. 해외 소비자가 믿고 구매하는 한국 브랜드도 보호 대상이다.
과거 관세청의 짝퉁 단속은 해외 유명 브랜드를 베낀 가방이나 의류가 국내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데 집중됐다. 한국도 한때 정교한 위조상품을 만드는 국가로 지목돼 해외의 감시를 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K-뷰티와 K-푸드, K-패션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한국 제품을 베낀 위조상품이 해외 시장에 쏟아지고 있다. 중저가 화장품까지 용기 모양과 포장 디자인, 내용물을 정교하게 흉내 낸다.
가짜 제품을 산 소비자가 품질에 실망하면 피해는 위조업체에서 끝나지 않는다. 정작 제품을 만들지 않은 국내 기업과 K-뷰티 전체의 신뢰가 함께 흔들릴 수 있다.
이 청장은 "과거에는 해외 명품 짝퉁이 국내로 들어오는 것을 많이 단속했다"며 "이제는 우리나라 세관이 K-브랜드를 먼저 보호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생겼다"고 말했다.
문제는 가짜 K-뷰티 제품이 외국에서 만들어져 다른 해외 국가로 판매된다는 점이다. 한국 관세청 직원이 현지 시장에 직접 나가 위조상품을 압수할 수는 없다.
그래서 관세청이 꺼낸 해법은 외국 세관과 협력하는 것이다. 외국 세관이 한국 브랜드의 위조상품을 단속하려면 우선 해당 국가 세관에 상표권이 등록돼 있어야 한다. 현지 세관 직원이 정품과 가품을 구별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
이 청장은 "외국 세관이 단속하려면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는 방법을 우리가 알려줘야 한다"며 "피해가 큰 국가의 세관에 우리 기업을 대신해 상표권을 등록하고 식별법도 교육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출하지 않고 수출실적만 만든다면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 기업 제품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가짜가 있다면, 국내에서는 기업 생태계의 공정한 경쟁을 무너뜨리는 가짜도 있다.
제대로 수출하지 않고도 수출을 많이 한 기업처럼 꾸미는 '가짜 무역실적'이다.
수출실적이 크면 매출과 성장성이 좋은 기업으로 평가받기 쉽다. 정부 지원사업에 선정되거나 기업공개를 추진할 때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수입가격을 실제보다 높게 신고해 공공기관 납품대금이나 정부 보조금을 더 받아내는 수법도 있다. 정부가 구매비용의 일정 비율을 보조하는 사업에서는 수입가격을 높일수록 업체가 받을 수 있는 보조금도 커진다. 가짜 실적과 조작된 가격은 국민 세금을 낭비하고, 정상적으로 사업하는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관세청은 이를 무역 기반 재정·금융범죄(TBFC)로 분류했다. 이 청장은 "하반기부터 정부 지원사업과 공공조달에 참여한 업체의 자료를 관계부처에서 받아 실제 수출입 신고 내용과 비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류에 적힌 실적과 실제 물품의 이동이 일치하는지, 신고가격을 인위적으로 부풀리지는 않았는지를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우회수출과 K-브랜드 위조상품이 해외 시장에서 한국 제품의 신뢰를 훼손한다면, 가짜 무역실적과 수입가격 조작은 국내 시장 질서를 흔든다.
이 청장이 관세청을 '국경을 오가는 사람과 물건, 돈을 관리하는 기관'이라고 설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관세청이 국경에서 확인하는 것은 물건에 적용할 세율만이 아니다. 정상적인 기업과 편법을 쓴 기업, 진짜 거래와 조작된 거래를 구별하는 일도 관세청의 역할인 것이다.
☞이종욱 관세청장은?
행정고시 43회로 공직에 입문해 관세청 수출입물류과장, 창조기획재정담당관, 인사관리담당관, 통관기획과장 등을 거쳤다. 2006년 관세청이 세계관세기구(WCO)로부터 지식재산권 보호 최우수국 대상을 받는 데 기여해 '올해의 관세인'에 선정됐다. 이후 인천본부세관 항만통관감시국장과 본청 심사국장·통관국장·기획조정관·조사국장을 역임하며 통관과 조사·기획 분야를 두루 경험했다. 조사국장 재임 당시에는 무역안보특별조사단을 이끌었고, 2025년 10월 관세청 차장으로 승진했다. 역대 다섯 번째 내부 승진 관세청장으로, 전임 이명구 청장에 이어 두 차례 연속 관세청 내부 출신이 청장에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