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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납세금 90% 탕감... '차무식 신화' 실제 가능할까?

  • 2023.04.24(월) 08:00

[프리미엄 택스리포트]택스형

평소 범죄물 드라마나 영화를 좋아하는 후배 녀석이 하도 재미나다길래, 지난 주말 '카지노' 라는 드라마를 찾아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 장르여서 '나중에 다시 보자'라는 생각으로 보다 말긴했는데 몇 장면이 꽤 강하게 인상에 남아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카지노 3회, 불법 도박장 운영으로 돈을 쓸어담던 주인공 차무식(최민식)이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고 80억원의 세금을 추징 당했는데 이를 둘러싸고 국세청 팀장 강민정(류현경)과 황당한(?) 협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후 관계 설명은 생략하고, 국세청 팀장이 추징된 세금을 내지 않은 체납자에게 체납세금의 90%를 깎아주는 통 큰 결정을 하는 내용이죠. 

이는 드라마상 설정일 뿐 현행 법과 제도상 결코 있을 수 없는,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세금이 무슨 시장통에서 이루어지는 흥정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며, 국세청 조사관이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선심이라도 쓰듯 세금탕감을 결정하는 것은 시스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드라마 '카지노' 스틸 사진(출처: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원칙적으로 세금고지서가 납세자에게 발부되면 5억원 이상은 10년, 5억원 미만은 5년의 소멸시효가 발동됩니다. 

이 소멸시효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체납자가 배째라 버티고 누워있는 통에 세금을 받아내지 못할지언정, 과세관청이 나서서 이를 깎아주는 등 조치를 실행할 수가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 한번 언급하자면 드라마상 국세청 팀장이 탕감율을 제안하자 주인공이 징역살고 말겠다며 더 깎아달라고 요구해 결국 90%를 깎는 대박을 터뜨리는 모습은 완전무결한 허구라는 것입니다. 

소멸시효 완성도 5~10년 이지만 체납자들이 이 기간 동안 무소득으로 버티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체납세금을 안내도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국가의 세금징수권을 안정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여러 법적 장치들이 존재해 이론상 죽기 전까지 계속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즉 국세기본법상 국가는 소멸시효 내 체납자에게 △납세고지 △독촉 또는 납부최고 △교부청구 △압류 등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소멸시효는 '중단'되고 납부기간이나 압류해제의 기간이 지난 뒤 다시 5년(또는 10년)의 소멸시효가 적용됩니다. 소멸시효 완성이 온전히 이루어진 후, 국세청이 체납정리을 하고 나서야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난 2021년 국정감사에서 1992년 종합소득세 1500만원을 체납한 사람이 30년이 훌쩍 지나서도 여전히 체납자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국세청 자료를 통해 확인되기도 했죠. 

드라마상은 물론 현실에서도 소위 '꾼'들이 불법 도박장으로 벌어들인 수익을 철저하게 숨기는 등 일종의 '꼬리표'가 남지 않도록 관리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국세청이 주인공에게 부과한 80억원의 세금은 단 한 푼도 받아내기가 힘들었을 수 있습니다. 

실제 지난해 국세청이 공개한 고액체납자 명단(개인)을 보면, 불법 도박장 운영으로 떼돈을 번 이들이 여전히 추징된 세금을 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A체납자 2015년 1738억원, B체납자 2016년 708억원 등).

이들의 세금 흥정이 끝난 후 국세청 조사관이 '어차피 자료도 없고 소송에서 이기기 힘들어 깎아줄 수밖에 없다'고 한 대사가 아주 현실성 없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국세청이 강도높게 세무조사를 해도 고도의 수법으로 소득을 숨긴 지능적 탈세자들으로부터 추징과는 별개로 실제 세금을 받아내는 일이 쉽지않다는 현실의 상황이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 대사를 통해 드러나 있는 셈이죠. 

다만 이 장면을 보고 깊은 인상, 엄밀히 말하면 아쉬움이 크게 남은 이유는 아무리 드라마의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더라도 너무 과했다는 개인적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꼰대같은 접근법일지 몰라도, 드라마가 미치는 영향력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극적 재미를 조금 손해보더라도 이런 설정은 자제했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행정상 조세포탈범으로 고발됐을 가능성이 높은 고액체납자가 버젓이 국내외를 돌아다니는(일부 예외가 적용되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5000만원 이상 국세 체납자는 출국금지 조치대상이 됩니다) 것 또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아쉬움과 별개로 이 장면에서 극의 배경이 된 시대와 관련한 재미있는 고증이 이루어진 부분이 있어 소개할까 합니다.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에 신경쓰다 보면 당연히 인식하지 못한채 지나쳐 버릴 고증인데, 국세청 팀장과 주인공이 협상을 하는 사무실에 걸려있는 국세청 청기(廳旗)에 새겨져 있는 '국세청CI(Corporate Identity)' 입니다. 

국세청은 지난 1999년 제2의 개청을 선언하면서 위 사진(왼쪽)과 같은 CI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세금징수기관이라는 전통적 이미지를 형상화하는데 치중된 나머지, 1999년 제정 이후 국세청 안팎에서 '갈쿠리로 세금을 긁어 소쿠리에 담는 듯한 형상'이라는 오해를 알게 모르게 받아왔었죠. 

과거 자료를 찾아보니 국세청의 옛 CI에서 소쿠리로 오해받은 녹색 형상은 공평성, 공정성, 투명성, 효율성, 청렴성 등을 상징하며 중심의 마름모꼴은 세금과 PC Key, 주판알(전산화가 이루어지기 전 주판은 국세공무원들의 필수품이었습니다)을 형상화했고 갈쿠리로 오해된 푸른 형상은 국세청의 미래 비전을 상징한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이후 2007년 국세청의 행정기관으로서의 기능이 복지로까지 확대되는 등 변모한 것을 계기삼아 교체한 바 있습니다(사진 가운데). 

이 드라마의 시대 배경이 2000년대 초중반이라는 점을 굳이 찾아보지 않더라도 단박에 알 수 있게 만들어주는 정말 꼼꼼하게 이루어진 고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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