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개봉한 '마이너리티 리포트' 영화 기억하시나요?
2054년 워싱턴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사전에 범죄를 예측해 막는 프리크라임이라는 시스템이 등장합니다. 범죄를 일으킬 것으로 예측되는 사람은 사후 범죄자와 똑같은 취급을 받아 처벌받습니다. 이는 국가가 개인의 내밀한 생각까지 들여다보고 발생하기 전, 범죄를 예측해 단죄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관세청도 이와 비슷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바로 해외 신용카드 사용내역 통보 제도인데요. 지난해 기준 연간 약 280만건, 금액으로는 5조3000억원의 해외 신용카드 사용내역을 실시간으로 통보받았습니다.
해외에서 물건을 구매한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관세청 레이더망에 걸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014년 제도 도입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에서도 개인정보 침해를 이유로 반대 의견을 내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한정된 인력으로 급증하는 여행자 휴대품을 전수 검사할 수 없다는 사정이 인정되면서 이 법안은 결국 통과됐습니다.
이후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해외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하면 관세청이 다 들여다 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해외에서는 현금만 사용해야 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떠돌고 있습니다.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실시간 통보, 사생활 침해 vs 과세권 확보
해외 신용카드 사용내역 통보 제도는 2014년부터 시행됐습니다. 제도 시행 당시에는 관세청이 카드사로부터 분기별로 5000달러 이상 결제 건만 통보받았는데요.
2018년 면세 한도가 400달러에서 600달러로 상향 조정되면서 기준이 600달러 이상 구매한 내역에 대해 실시간 통보받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2022년 면세 한도를 600달러에서 800달러로 상향하면서, 올해 시행령을 개정해 800달러를 초과하는 카드 내역을 통보받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관세청이 해외 신용카드 사용내역 전부를 통보받는 것은 아닙니다. 여행자가 해외에서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로 800달러(한화 약 110만원)를 초과해 결제하면, 카드사는 쇼핑, 리테일 업종으로 분류한 내역만 골라내 관세청에 보내는 것인데요.
관세청은 해외 여행 중 식사·숙박·투어에 쓴 내역은 제외하고, 오직 물건 구매 내역만 받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면세한도 초과 가능성이 높은 쇼핑 내역만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 자료를 활용해 누가 세금을 내지 않고 몰래 물건을 들여오는지 감시하는 것이죠.
관세청이 통보받은 내용의 규모를 살펴보면 그 양이 어마어마합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오기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관세청이 지난해 제공받은 해외 신용카드 사용내역은 279만4000건, 금액으로는 5조2753억원 규모입니다. 국내 여행자들이 해외에서 600달러(지난해 통보 기준) 넘는 물품을 구매한 금액이 연간 5조원이 넘는다는 의미입니다.
관세청은 이 자료를 토대로 작년 한 해 4만7000건 물품을 검사했고, 면세한도를 초과한 금액에 대해 총 186억2800만원을 과세했습니다.


추징금액이 가장 많은 상위 10개 물품을 살펴보니, 1위는 역시 명품 가방과 지갑이었습니다. 지난해 1년간 면세한도를 초과해 들여오다 인천공항세관에서 적발한 가방·지갑에 과세한 금액은 무려 113억1700만원이었습니다. 이어 2위와 3위는 의류와 섬유제품(인천공항세관, 16억3600만원), 시계(인천공항세관, 13억2000만원) 순이었습니다.
특히 가방과 지갑은 인천공항뿐 아니라 김해·김포공항, 청주·대구세관 등 전국 세관에서도 추징 상위 품목으로 꼽혔습니다. 이 외에도 보석·귀금속(금·은·백금 등), 명품 신발, 팔찌·귀걸이 등 명품 액세서리도 과세액 상위권에 포함됐습니다.

이런 적발 내역만 보면 관세청의 해외 신용카드 사용내역 통보 제도가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 그만큼 자진신고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방증일 텐데요.
그럼에도 정부가 내 소비내역을 들여다본다는 불쾌함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마치 나를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비슷한 맥락이죠.
이에 관세청은 '모든 소비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다'는 점을 강조하는데요. 관세청 관계자는 "여행자의 사적인 소비 패턴을 파악하려는 것이 아니라, 해외에서 구매한 물건을 신고하지 않고 들여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며 "통보 금액 기준이 면세한도와 같은 800달러 이상인 것도 이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결국 해답은 '자진신고'
사실 관세청이 이런 제도를 도입한 것도, 여행자 휴대품 통관 검사가 '복불복'이라는 인식 때문입니다. 대부분 통관 검사는 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단 신고하지 않고 버틴다면 세금을 아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자진신고를 망설이게 하는 것입니다.
관세청도 여행자들의 자진신고 비율을 높이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여행자들이 구매 물품을 쉽고 간편하게 신고할 수 있도록 2022년 모바일 자진신고 앱을 개발해 서비스하는 것도 그 일환입니다.
오기형 의원실에 따르면 관세청은 2021년 예산 10억4000만원을 들여 '여행자 세관신고' 앱을 개발해 2022년부터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이용률은 저조했습니다. 2022년 여행자 휴대품 세관 신고 건수는 125만2751건이었지만, 세관신고 앱을 이용해 신고한 건수는 20.4%에 불과했습니다.
2023년 5월부터 세관 신고 대상 물품이 없는 경우에는 신고서를 작성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앱 자진신고 비율은 25.5%에 머물렀습니다. 2024년 28.6%, 2025년 8월 기준 22%로 계속 20%대에 머물러 있죠.
일부 여행자들은 앱으로 자진신고를 하려고 했더니 세관 직원이 앱 신고 절차에 대해 잘 모르더라는 경험담을 전하기도 했는데요. 여행자의 편의를 위해 10억원이나 들여서 만든 취지가 무색하게 돼 버린 것입니다.
이에 관세청도 세관신고 앱 활성화를 위해 자진신고 시 세액의 30%를 감면해준다는 점을 적극 홍보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관세청 관계자는 "자진신고 하면 관세를 30% 감면받을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가산세 40%를 추가로 부과한다. 2년 이내 두 차례 이상 적발된 여행자에게는 60% 가산세를 부과한다"며 "자진신고 감면율까지 감안하면 70~90%에 달하는 세금을 내는 수준"이라고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