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직장인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연말정산. 올해로 52년을 맞은 이 제도는 꾸준한 전산화·간소화로 신고 과정은 한결 편리해졌습니다.
하지만 공제 항목만큼은 여전히 1980~1990년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인적공제, 교육비·의료비 공제, 주택자금 공제는 1980년대에 도입됐고, 부녀자 공제, 보험료 공제, 신용카드 사용액 소득공제는 1990년대의 산물입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했지만 연말정산은 여전히 '응답하라 1994'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셈입니다.
치솟는 물가 속에 근로자들은 더 넓은 공제 혜택을 요구합니다. 정치권도 이에 호응해 부분적으로 손질했지만 대부분 땜질식 처방에 그쳤습니다. 2년 전 직장인 식대 비과세 한도를 10만원에서 20만원으로 늘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 내년부터는 정부가 '직장인 든든한 한 끼'라는 이름으로 점심값 지원 시범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소득이 있는 직장인의 식비를 세금으로 보전하는 게 맞느냐는 논란이 뒤따릅니다.
결국 지금의 연말정산은 시대 변화에 맞는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한 채, 그때그때의 이슈에 따라 덧대어진 낡은 옷을 걸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출산·고령화, 인공지능(AI) 전환이라는 격변기 속에서 이제는 연말정산 재설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택스워치가 그 해법을 제안합니다.

재설계1. 신용카드 소득공제→디지털 생활 공제

빼기(-): 신용카드 소득공제
'연말정산의 꽃'이라 불리는 신용카드 등 사용액 소득공제 제도의 연간 조세지출 규모는 2025년(전망) 4조3693억원입니다. 조세지출 항목 중 4위를 차지하죠.
이 제도가 논란인 이유는 소득 양성화라는 목적을 이미 달성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이 제도가 시행된 1999년도에는 현금 거래가 일상이었고 자영업자들은 매출을 숨겼습니다. 정부 입장에서는 소득 양성화가 절실했죠.
당시 등장한 것이 신용카드 소득공제였습니다. 신용카드 사용액에 대해서 정부가 소득공제를 해주겠다는 당근을 제시했죠. 처음에는 3년만 시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보다 근로자들의 반응이 너무 뜨거웠죠. 연말정산 때 거의 돌려받을 것이 없는 미혼 직장인에게 신용카드 소득공제는 꿀 같은 존재였고, 결국 2~3년 주기로 일몰이 10회 연장됐죠. 올해 또 연장될 거라고 하네요.
초기에는 신용카드 사용액만 공제 대상이었으나, 현재는 체크카드, 현금영수증, 전통시장·대중교통·제로페이, 도서·공연비 등으로 공제 범위가 확대됐습니다. 신용카드 소득공제 폐지 필요성은 다들 공감하지만 국민들의 거센 반발에 용기있게 폐기하겠다는 정치인도, 정부도 없는데요.
내년에는 자녀 1명당 신용카드 소득공제 한도가 최대 100만원 늘어난다고 합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은 대체 누가 걸 수 있는 걸까요?
더하기(+): 디지털 생활 공제&개인 디지털 정보 자산 기부 공제
과거 신용카드는 자영업자의 소득을 양성화하는 데 활용됐지만 현재는 국민의 소비 패턴을 분석하는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카드사와 정부는 신용카드 사용내역을 통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소비하는지 파악하죠.
국세청과 관세청은 과세자료로 활용하기도 하고 수사기관은 수사과정에 활용하기도 합니다. 대중교통 사용내역 역시 정부와 교통공사의 교통정책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죠.
데이터가 돈이 되는 시대가 됐습니다. 개인이 생산하는 새로운 자산인 데이터를 국가와 기업이 활용합니다. 데이터는 디지털 경제 활성화에 필요한 중요한 자산입니다. 반면 개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국가와 기업이 내 데이터를 활용하는 것에 대한 불쾌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개인이 생성한 데이터를 국가 정책 수립에 활용한다면, 정부는 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제공해야 합니다. 데이터 활용이 국가·기업 모두의 이익이 되는 만큼, 세제 인센티브를 통해 국민 참여를 유도하는 정책도 필요합니다.
이제 개인이 생산하는 데이터의 가치를 국가가 제도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시대가 다가온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개인이 생성하는 데이터 가치 인정과 디지털 경제 활성화 측면에서 '디지털 생활 공제'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기존의 신용카드 소득공제가 사용액이 기준이었다면, 디지털 생활 공제는 데이터 이용과 생성 행위를 기준으로 공제하는 방식입니다. 대중교통 이용, 온라인 결제, 소액 간편결제 등 데이터 생성을 많이 할수록 공제 혜택을 더 주는 것이죠.
본인인증이나 마이데이터 등 본인의 개인정보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도 공제하고, 통신비와 플랫폼 구독료 등의 일부도 공제 범위에 포함한다면 개인이 생성한 데이터에 대해 보상을 받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더해 현금을 기준으로 공제해주는 기부금 공제도 개편이 필요합니다. 공제 대상에 개인이 생산한 데이터도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합니다. 국민이 자신의 데이터를 연구·공익 목적으로 제공할 경우, 이를 기부로 간주하고 공제 혜택을 주는 방식인데요.
교통이나 통신데이터를 기부해 스마트시티·교통정책 연구에 기여했거나, 금융데이터를 기부해 금융 연구나 소비자 보호 정책 수립에 기여했다면 기부로 인정해주는 것이죠. 병원 진료 기록이나 건강검진 데이터 등 의료데이터를 공공 연구기관에 기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종의 개인 디지털 정보 자산 기부 공제죠.
2025년 대한민국은 디지털 전환, AI 시대에 맞는 연말정산 재설계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재설계2. 부녀자·한부모·의료비·자녀 공제 → 통합 돌봄비용 공제

빼기(-): 부녀자 공제
부녀자(婦女子)라는 말 자체만으로도 고리타분하죠? 부녀자는 기혼 여성과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단어로 과거에는 법률이나 행정용어에서 쓰였지만 지금은 성차별적이라는 이유로 거의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세법에서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부녀자 공제'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부녀자공제는 배우자 유무와 관계없이 기본공제대상자인 부양가족이 있는 여성근로자가 종합소득금액이 3000만원 이하일 경우 연 50만원의 공제 혜택을 주는 제도입니다.
배우자가 있어도, 배우자의 소득은 보지 않습니다. 배우자가 얼마를 버든 여성근로자가 종합소득금액이 3000만원 이하이면서 부모나 자녀 등 부양가족이 있다면 이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제도는 1990년대 여성의 사회진출을 독려하고자 도입됐는데요. 당시 가사는 여성의 몫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여성이 경제활동을 하려면 가사비용을 보조해줘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 이런 제도를 도입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국세청도 부녀자 공제의 취지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지난해 부녀자 공제 도입 취지가 무엇인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국세청 직원도 잘 모르겠다며 법 조문을 한참 찾아봤다는데요. 존재 가치를 상실한 부녀자 공제, 왜 아직도 있는 걸까요?
더하기(+): 통합 돌봄비용 공제
아동과 노인, 장애인은 가족의 돌봄이 필요합니다. 아동에 대한 돌봄비용은 교육비 공제로, 노인의 간병비나 요양시설비, 의료비 등은 의료비 공제에서 지원을 받습니다. 장애인 돌봄비용도 의료비 공제를 통해서 받죠.
이런 돌봄 비용에 대한 공제 항목이 각각 쪼개져 있다 보니 근로자 입장에서는 각기 다른 기준을 적용해 세제혜택을 받기 번거롭습니다. 그리고 공제 항목의 취지나 명분이 약할 수밖에 없죠.
자녀 세액공제나 한부모 공제, 부녀자 공제 등도 일종의 자녀(또는 가족) 돌봄비용 지원이라는 성격이 있지만, 제도의 명분이나 취지가 불명확합니다. 납세자 입장에서는 공제 항목이나 절차가 너무 복잡하죠. 택스워치는 흩어진 돌봄 비용 지원 성격의 공제를 통합해 '통합 돌봄비용 공제' 항목을 신설하자고 제안합니다.
카테고리는 크게 아동, 노인, 장애인, 질병에 걸린 부양가족으로 나눕니다. 아동의 경우 베이비시터 비용, 어린이집·유치원 비용, 돌봄교실 비용, 초등학생 예체능 학원비, 아동 의료비 등을 공제 대상으로 합니다.
노인의 경우 요양시설 이용료, 간병비, 재가요양 서비스 비용, 노인 의료비 등을 공제 대상으로 합니다. 장애인의 경우 재활치료, 활동지원 서비스 비용, 보조기기 구입비 등을 공제 대상으로 하는 것이죠.
이미 교육비나 의료비 공제로 지원하는 것을 번거롭게 통합 돌봄비용 공제로 왜 통합하느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급속도로 진행되는 저출산·고령화 시대에서 돌봄비용을 국가적 차원에서 인정해준다는 것은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돌봄에는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지만 대부분 가족의 돌봄노동 무상제공 또는 비용 부담으로 이뤄집니다.
결혼과 출산이 가족 구성원의 희생으로 이뤄져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국가와 사회가 은연 중에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와 사회에서 돌봄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인식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을 불러옵니다. 이는 비혼과 저출산 현상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합니다.
저출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돌봄활동에는 비용이 든다는 인식 전환이 필요한 것입니다.
재설계3. 의료비·보장성 보험 공제 → 통합 건강증진 공제

빼기(-): 의료비·보장성 보험 공제
의료비 공제는 병원비와 의약품, 의료기기 구입, 안경 구입비, 산후조리원 비용 등이 공제 대상입니다. 가족의 요양병원 비용이나, 난임시술비 등도 공제 대상이죠. 건강검진비용은 공제되지만 건강식품 구입 비용은 공제 대상이 아닙니다.
사실 의료비 공제 제도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우리나라가 저출산·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의료비 공제의 재설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의 의료비 공제 제도는 사후 치료비를 지원해준다는 개념에 가깝죠.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면 의료비용이 급증해 건강보험 재정에 부담이 갈 것은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이에 사후 치료비 지원에 가까운 의료비 공제 제도를 사전 예방 개념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보장성 보험 공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 제도는 공제 한도가 100만원에 불과해 근로자들의 불만이 많은 항목 중 하나죠. 자동차 보험은 필수 가입이기 때문에 자동차 보험만 하더라도 공제 한도를 채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구나 요새 실손의료보험 가입을 하지 않은 사람을 보기 드물죠.
부양가족의 보험료까지 하면 공제 한도 100만원은 턱 없이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한도를 대폭 늘리기에는 실손의료보험 가입자가 많아 오히려 국가재정에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이에 보장성 보험 제도도 재설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더하기(+): 통합 건강증진 공제(질병 사전예방 공제)
대안은 의료비와 보장성 보험 공제를 통합해 '통합 건강증진 공제' 항목을 신설하는 것입니다. 핵심은 질병 사전 예방입니다.
질병에 걸리기 전에 사전에 건강을 관리해 의료비 지출을 최소화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공제 대상은 헬스나 수영, 필라테스, 요가 등 운동 시설 이용 비용과 재활·체력 관리 운동 비용 등입니다. 예방접종이나 건강검진 비용, 의사나 영양사의 처방을 받은 건강보조식품, 기능성 표기 식품도 공제 대상이 되는 거죠.
문제는 고소득층일수록 건강관리 비용 지출 여력이 크다는 점입니다. 고소득층이 더 혜택을 보는 역진성이 우려되는 것이죠.
이런 문제는 지금의 월세 세액공제 제도에 착안해 소득에 따라 공제율을 다르게 한다거나, 공제 한도에 차등을 주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저소득층의 건강관리 비용 공제율을 더 높게 적용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죠. 월세 세액공제는 총 급여액 7000만원 이하 근로자만 혜택을 받을 수 있으며, 소득에 따라 공제율은 10~12%로 차등 적용하는 방식을 적용하면 됩니다.
그렇다고 사후 치료비를 공제 대상에서 제외한다면 불가피하게 질병이나 사고로 고통받는 이들이 경제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사후 치료비의 경우 건강증진 공제와 공제율에 차등을 줘, 사전 건강 관리 대한 인센티브를 더 많이 주는 것이 질병 예방효과가 더 클 것입니다.
보장성 보험 공제 제도는 취지 자체가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해 드는 보험료 지원 성격이 강합니다. 자연스럽게 통합 건강증진 공제에 흡수통합시킨다면 사전 건강 관리 노력에 대한 인센티브라는 명목으로 명분과 실리 모두를 챙길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