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의 얘기다. 국세청의 홈택스(2002년 개통) 서비스가 정착되지 않았던 과거만 해도 국세 신고·납부 마감일을 앞두고 전국 세무서는 납세자들로 북적거렸다.
관련 서류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신고서와 대조하며 작성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증빙서류가 신고 내용과 다르다는 이유로 국세공무원·납세자 간 다툼도 잦았다.
물론 그간 한국의 세금 신고는 보다 간편해졌다. 이제는 스마트폰 만으로 세금 내용을 확인한 뒤 납부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대부분의 국세가 자진신고·납부 세목이란 점에서, '납세협력비용' 부담을 덜어주는 쪽으로 국세행정을 설계하는 건 국세청의 당연한 책무로 여겨진다.
세율을 낮추지 않더라도 실질 감세 효과를 가져올 수 있고, 국가 재정에도 부담을 주지 않기에 양측이 '윈-윈' 할 수 있는 전략이다. 국세청이 전자 세정 서비스를 지속 손질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경제성장 고려 없이 표면적으로 납세협력비용은 15조원까지 불어난 상태다.
납세협력비용, 절반 가까이 소득세에서 나온다
납세협력비용은 증빙의 수취·보관, 신고서 작성·제출, 세무조사 등 세금을 납부하는 과정에서 납세자가 부담하는 세금 이외의 경제적, 시간적, 심리적 비용을 의미한다. 국세청은 5~6년 주기로 이 비용 추정에 대한 연구용역을 맡겨 보고서를 받아 보고 있다. 이를 통해 업종·규모별 비용의 규모라든지 주로 어떤 분야에서 발생하는지를 살펴본 뒤, 납세자별로 비용 감축을 위한 로드맵을 만든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이하 조세연)이 지난해 내놓은 '국세행정에 대한 납세협력비용 측정'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한국 사업자가 부담하는 납세협력비용은 총 15조442억원이다. 국내총생산(GDP, 2071조6580억원)의 0.73% 수준으로, 조세연이 이 비용을 측정한 건 네 번째다. 2008년 최초로 측정한 추정 비용은 7조140억원(2007년 기준)이었다. 이후 2011년엔 9조8878억원, 2016년엔 11조1179억원을 납세의무 이행 때 드는 돈으로 봤다.
세목별로는 소득세(40.2%)·부가가치세(28%)·법인세(21.9%), 3대 세목이 전체 납세협력비용의 90%를 차지했다. 원천세의 비중은 8.2%였다. 대부분 이 4개 세목에서 납세협력비용이 발생한다고 보면 된다. 업종으로 따지면 도·소매업(22.5%), 서비스업(15.7%), 부동산업(15.4%), 제조업(14%) 순으로 많이 발생했다.
세무 업무가 복잡하다면 더 낸다
사업자당 납세협력비용은 183만원이었다. 이는 납세협력비용 총액을 법인세(또는 소득세) 신고인원으로 나누어 계산한 결과다. 사업자당 납세협력비용은 대체로 세무 업무가 상대적으로 더 복잡한 유형일수록 높아지는 경향이 짙었다. 실제 법인·개인사업자 중 세무 업무가 가장 복잡하다 할 수 있는 일반유형의 경우는 각각 580만원·307만원으로 추정된 반면, 간편·단순 유형 개인사업자의 납세협력비용은 각각 94만원·50만원으로 격차가 컸다.
사업자당 납세협력비용이 가장 작은 업종은 서비스업(76만원)으로 파악됐다. 해당 업종에 세무 업무가 단순하고 영세한 개인사업자들이 다수 분포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기타 업종(전기·가스 증기·수도·사회복지 서비스업 등)에서 납세협력비용(583만원)이 가장 많이 발생했고, 그다음은 제조업(397만원)·금융 및 보험업(333만원) 순이었다.
정보제공의무 유형(13가지)별로는 '증빙수취·장부기장'이 전체 납세협력비용의 44.6%를 차지했다. 신고납부(31.4%), 거래증빙발급(12%)의 비중도 컸다. 납세협력 투입시간이 가장 많이 걸린 유형도 증빙수취·장부기장(58.3%)이었다. 조세연은 "사업자의 신고유형, 업종, 종업원 수 규모 등에 상관없이 증빙수취·장부기장과 거래증빙발급 부문에서 가장 많은 투입시간이 소요된다"고 설명했다.
납세협력비용 규모 커졌지만, 속살 보면 줄었다
사실 세금 신고를 할 때 제출하는 서류가 간소화되면서 납세자의 부대비용은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납세협력비용이 더 늘어난 건 왜일까. 경제성장이 비용을 측정할 때 중요한 잣대로 쓰이기 때문에서다. 국세청 관계자는 "사업자 수가 늘고 물가가 상승하며 양적인 측면에서 증가한 구조이기에, 3차와 4차 측정치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4차 납세협력비용 측정 땐, 다른 연구 방식을 사용했다고 한다. 만약 이전과 같은 연구 방식에 더해 물가 조정이 이루어진다면, 최근의 납세협력비용 추정치는 3차(11조1179억원) 때보다 작아진다는 게 국세청의 설명이다.
국세청이 최초로 납세협력비용을 측정한 뒤, 2차 측정(2013년 조사)이 있기 전까지 세정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직접적 표현으론 납세협력비용 감축이다. 대표적으로 전자세금계산서 도입 등이 꼽힌다. 이런 조치가 어느 정도 결실을 맺은 듯 보인다. 실제 2011년(2차 추정치) 기준 납세협력비용은 GDP의 0.8% 수준인 9조8878억원이었는데, 2007년(GDP의 0.85%인 7조6000억원)보다 규모는 늘었지만 GDP 대비 비율로는 줄었다.
3차 측정이 있고 나서도 납세협력비용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4대 중점분야(신고납부, 증빙서류 발급, 증빙서류 수취·보관, 장부기장)를 중심으로 국세행정에 변화를 가했다. 작년에 추진한 납세협력비용 감축 과제만 19개다. ARS 미납국세 납부서비스 제공, 소득세 모두채움 서비스 확대, 1대1 맞춤형 가업승계 세무컨설팅 실시, 장려금 자동신청 제도 도입 등을 주요 과제로 들 수 있다.
비용 감축 과제, '이곳'에서 발굴해라
조세연은 보고서를 통해 "최근 납세의무 이행과 관련된 환경은 납세협력 비용 및 투입시간을 줄이는 방향으로 상당한 진척이 있었다"고 진단했다. 현재 한국처럼 납세협력비용을 대규모로 파악하는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도 찾기 어렵다고 한다. 세무 행정의 전산화가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는 점에서, 낡은 측정 방식을 고쳐야 한단 시각도 적지 않다.
조세연은 "최근에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감축이 필요한 영역을 발굴할 수 있으므로 화폐단위로 납세협력비용을 측정하는 방식을 반드시 이용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된다"며 "납세자와 과세당국이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채널을 적극 활용한다면 적은 시간과 자원으로 납세협력비용 감축과제를 발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전자민원시스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채널로 납세자의 불편 사항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고 봤다. 현재 국세청은 4차 납세협력비용 측정 결과에 따라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제도의 개선을 준비하고 있다. 국세청 관계자는 "어떤 분야를 감축할지 대략적인 안은 나왔지만, 아직 확정은 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